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이파이 Oct 02. 2023

이우학교 등굣길엔 뱅크시가 ··· “없다!”

이우학교 등굣길을 가득 채운 낙서에 대해 / 김가진

 좋게 말하면 그래피티, 나쁘게 말하면 낙서인 무엇이 재작년부터 등굣길에 늘어가고 있다. 비록 그래피티라는 활동이 예술의 범주에 포함된다지만 이 낙서들은 예술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불쾌감을 유발하고 있고, 심지어 몇몇 낙서들은 학교에 대한 적개심마저 드러내고 있다. 이는 일차로 학교의 미관을 해치고 이차적으로 학생들의 정서에 악영향을 초래한다.



그래피티의 역사


 그래피티는 긁다, 낙서라는 뜻을 가진 이탈리아어로 과거 선사시대에서부터 등장했다고 볼 수 있는 예술 행위 중 하나이다. 관점에 따라 선사시대의 벽화를 그래피티의 시조라고 볼 수도 있고 1960년대 말 흑인들이 그들의 불만을 표출하는 벽화들을 시조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 그래피티의 시작은 1960년대 말 미국 우범지역에서 나타난 벽화들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힙합 문화의 일부로서 많은 사회적 문제와 함께 등장했기에 현대미술이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현재는 엄연히 예술의 한 분야로 인정받는 추세이다.

 이러한 그래피티 미술은 ‘네오익스프레셔니즘(Neo-Expressionism: 신 표현주의)’로 분류 가능한데, 이는 전통적인 표현주의의 구성 방식을 거부하고 작가의 주관적인 인식과 역사적인 의식을 결합하여 그림을 그려내는 사조이다. 1세대 그래피티 아티스트이자 흑인 인권, 죽음 등의 역사적인 의식을 벽화를 통해 표현한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역시 신표현주의 작가로 분류되기도 한다. 특히 바스키아는 지하철 낙서에 불과하고 불쾌를 조성하던 그래피티를 예술의 경지로 편입시키는 것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낙서가 어떻게 예술인가?


 그래피티가 이러한 예술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은 -간단히 말하자면-당시 포스트모더니즘이 추구하던 예술의 모호성 덕분이었다. 1960년대 중반에 이루어지던 탈근대적인 시류(이성이란 도구로 세계를 정립하려는 시도들을 부정)와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는 예술작품을 이성을 통한 기준으로 판단하려는 관념들을 전복시켰고 예술의 판단 기준에 감성이라는 영역의 크길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팝아트, 개념미술, 미니멀리즘 미술 등이 일반적인 미술의 영역을 벗어나며 미니멀리즘은 사물로, 개념미술은 문학으로 표현되었으며 팝아트는 키치(복제품과 그를 통한 혼합미술)를 예술의 영역으로 복속시켰다. 이는 예술을 정치적 사상과 별개의 것으로 분리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과거 비트겐슈타인, 바움가르텐의 미학 이론 등을 사용해 예술의 영역을 넓히는 시도를 이어갔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적 표현에 고정된 대상이 있어 그 둘이 일대일로 대응한다는 것에 반대하여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되는 ‘아름다움’이란 개념을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바움가르텐은 간단히 말해 아름다움이란 느껴지는 감성의 영역에 존재한다고 보았는데, 이는 감각적 인식을 통해 미를 규정하려 한 것이다. 

 이후 독일의 미학자 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 Adorno)는 아방가르드라는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방식의 현대예술에 대해 “내용은 형식 속에 침전된다.”라고 말하며 예술이 던지는 메시지를 알아내기 위해선 형식을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형식화된 작품의 형식 속에서 내용을 불러일으킨다면 미적 성공, 나아가 예술로 파악 가능하게 된다. 이에 현대예술에서는 예술의 본질 구성적 의미에서 예술 향유의 개념이 사라졌다. 즉, 아름다움을 버리고 새로움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유럽의 탈근대적 움직임과 함께 찾아온 예술 범주의 모호함, 새로움의 추구가 그래피티의 예술화를 촉진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전부 서구 세계의 상황이며 한국의 대중적 정서는 이를 따라가지 않았는데, 이 시기에 한국의 미술은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1950~60년대 전후(戰後) 상황에 한국에서는 ‘모던아트협회’, ‘창작미술협회’ 등이 결성되며 세계적 미술 흐름에 따라가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유교적 가치관과 서양미술 가치관의 대립으로 포스트모더니즘적 시도는 서구처럼 본격화되지 못했으며 한국은 그래피티가 아닌 ‘괘화’라는 독자적 벽화로 시대에 대한 반항심을 드러냈다. 한국의 공공미술, 그에 소속된 벽화는 괘화라는 개념이 꿰찬 것이다. 이후 한국의 공공미술과 벽화는 유럽의 분야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로써, 본질적으로 그래피티가 한국의 정서와 공공미술에 편입되기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 한국 정서가 낙서에 부정적 인식을 갖는 이유 역시 설명 가능하다. 한국에서 그래피티(낙서 등)는 불법낙서로, 해당 재물(벽 등) 소유주의 승인을 구하지 않는 것이 다반사 이다. 벽에 그리는 불법낙서는 재물손괴죄에 해당하므로, 분명 그래피티는 예술이지만 동시에 범법행위로도 간주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우학교에 그려진 그래피티(이하 낙서)들은 예술로 취급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이는 뱅크시처럼 구성원 공동의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하는 ‘그림’의 부재와 바스키아처럼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는 형상적 이미지의 부재. 그리고 감상자로 하여금 고찰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감성적 메시지의 부재 때문이다. 이우학교 등굣길 벽면에 그려진 그림들은 어떤 형상을 통해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는지를 전혀 알 수 없다. 특히 벽면에 그려진 사람의 얼굴, 담배, 공룡, 거미 그림들은 어린아이의 낙서 수준을 하회하는 동시에 심미적 불쾌만을 조성한다. 이렇게 학교 벽면에 그려진 낙서들은 고전예술적인 평가 기준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적 기준에서도, 그 어떤 예술의 기준에도 부합하지 않기에 그래피티라는 명목을 가진 ‘저급한 낙서’, 혹은 청소년기의 ‘일탈적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우학교 등굣길에 그려진 낙서

 등굣길 바닥에 그려진 낙서는 이러한 기준에 조금 부합하다고 볼 수 있다. 학교를 향한 화살표에 X를 덧씌운 이 낙서는 '기호'라는 기초적 형식으로부터 학교로 가지 말라는 침전된 메시지(내용)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용하긴 어렵다. 먼저, 뱅크시나 바스키아와 같은 '문제에 대한 지적'이 아니라, 원론적 비판과 주장 투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 또, 이우학교의 정서와 맞지 않는다는 점. 마지막으로 감상자로 하여금 통학에 대한 어떤 문제의식도 일깨우지 못하고 되려 낙서에 대한 문제의식, 혐오감을 조성한다는 점 때문이다.


이우학교 등굣길 왼편에 쓰인 낙서

 이러한 반항적인 메시지가 본질적으로 비도덕적이며 악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메시지는 더욱 성숙한 방식으로 표현되어야만 한다. 그래피티는 반드시 익명 활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익명성 뒤에 숨어 원초적인 적개심만을 표출하는 것은 모두에게 해악이 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이우학교에 함께 등교하는 중학생의 경우, 학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깨진 유리창 효과로 인한 낙서충동을 유발할 수 있다. 넓게는 이우학생, 좁게는 중학생들의 정서 발달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낙서의 당사자는 본인의 낙서가 일부(혹은 다수)의 학생들에게 불쾌를 유발한다는 사실, 이우학교는 고등학생뿐만 아니라 중학생들도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라는 점 유념해야 한다.



3줄요약


1. 등굣길 등에 그려진 낙서는 미적 불쾌를 유발해 예술이라 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2. 학교에 대한 적개심은 학교와 학생의 발전에 도움이 될만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함이 적절하다.
3. 행위자는 낙서가 타인을 비롯한 모두에게 해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하며 나아가 학교의 구성원 모두는 낙서를 자제함이 올바르다.
이전 09화 이우에서 살아남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