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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파이 Jun 05. 2020

주민등록증발급기

주민등록증 발급 신청을 하러 갔다.

종일 밖을 나가지 않아서 그런지

자전거를 타고 나서는 순간이 상쾌했다.

주민등록증발급통지서가 날아온 것은 작년이었다.

생일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받게 되었다.

'귀하'가 민증을 받을 연령이 되었단다.

사실 뻐기고 있었다. 받기 싫어서.

피터펜 콤플렉스라도 있나. 나름의 부담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민증'이라는 단어 자체가

엄청난 무게로 다가오지 않았다.

이전까지는 '올 것이 왔구나'라던가

'지금부터 시작되는 영원한 구속'이라던가.

이제는 그저 보건소에서 예방주사 맞기 위해 인적사항을 적는 것 정도. 

동사무소는 사전투표를 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평소보다 북적였다.

민원실로 들어간다.

눈앞에 보이는 조금은 무료해 보이는 일개 공무원에게 간다.

"민증..발급.."

말이 잘 안 나온다.

"발급이 아니라.. 발급 신청..? 받으려면 어디로 가야 해요?"

젊었을 땐 예쁘다 소문나서 인기가 많았지만

이제는 시든 꽃이 되어 가장 보통의 삶을 사는,

삶에 질린 일개 공무원은 말없이 기계적으로

내 학생증과 증명사진을 받아간다.

말하는 투가 경어(敬語)와 경어(輕語)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한다.

묘하게 업신 당하기도,

묘하게 존중받기도 했다.

이게 한국 청소년의 위치인가? 

일개 공무원은 노란색 종이를 가져와서

나름 노력하여 얻은 현재의 자기 책상에서

한 번 접고,

두 번 접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필요한 내용을 다 적으세요."

이름

전화번호

주소

주민등록번호

혈액형까지

.

.

.

조금은 본능적으로 외우고 있는 것들.

이정도는 알고 있어야

이 사회의 '일원'이지만

조금은 근본적으로

'저것들이 삶에서 진정 필요한가?'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나는 계속해서 그 일개 공무원 앞에서 위축되어 있었다.

미적거리며 다 쓴 종이를 가져갔다.

"잘하셨어요."

기계적이어야 한다는 것까지 공무원의 의무라는 듯.

게다가 저건

지극히 보편적인 교사의 말투. 

갑자기 성큼성큼 내게 걸어온다.

나는 의아한 채로 다가오는 일개 공무원을 눈으로 따라간다.

내가 앉은 의자를 지나쳐 무언가 부스럭거린다.

회색 플라스틱 통.

저기엔 또 무엇이 담겨있을까.

"시간이 좀 걸려요."

"아 네..."

노란색 종이를 다시 보니 '오른손', '왼손'이 적혀있다.

아 지문.

왜 내 손으로 내 무덤을 파는 기분일까.

회색 통 안에는 작은 롤러가 들어있었다.

일개 공무원은 롤러를 집어 들더니

"손 주세요."

하루에 100명의 아이에게 주사를 놓는 간호사처럼,

질린 듯이.

일개 공무원은 일을 빠르게 처리하려는 건지,

아니면 이미 많이 해본 터라 능숙해서 그런지,

말이 아주 빨랐다.

"손 펴세요."

"손 힘 빼시고."

"옆면부터 이렇게. 꾹 누르지 말고."

"꾹 누르면 오히려 잉크가 번져요."

"자 빠르게. 손에 힘 빼고."

지문을 찍은 뒤에는,

"아 잘 나왔어요."

"다시 한번."

"자 손에 힘 빼고. 자연스럽게."

"옆면부터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네, 좋아요." 

긴박했다.

일개 공무원은 내 손가락을 쥐고 빠르게 지문을 찍어나갔다.

마치 소매치기가 화려한 언변으로 선량한 시민의 정신을 빼놓고

물건을 훔쳐가는 것처럼.

나는 정신이 없었고, 그사이에 열 손가락의 지문이 죄다 찍혀 있었다. 

"이제는 두 마디씩 할 거예요."

다시 내 손가락에 롤러질을 해댔다.

동사무소 공무원이 이렇게 물리적인 업무를 할 줄이야.

뜬금없이

"이우고등학교예요?"

아마 내 학생증을 보고 하는 소리겠지.

'이우학교'라는 단어가 익숙치 않은 말투였다.

"아 네.."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자 오른손부터."

"힘 빼시고."

"빠르게."

"손가락. 쫙 펴시고."

"하나, 둘, 셋"

쿵.

"네, 잘 나왔어요."

나는 힘을 줄 틈도 없었다. 

검은색 지문들이 다 찍혔는데

오랑우탄의 지문을 채취해도 똑같이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일개 공무원은 잉크를 지우는 물티슈를 던져줬다.

"1차로 물티슈로 닦고, 2차로 화장실에 가서 비누로 닦으면 다 지워져요."

일개 공무원이 일 처리를 더 하는 동안 나는 슥슥 잉크를 닦았다.

닦아도 지문 골 사이사이에 스민 잉크는 잘 지워지지 않아

등고선 같았다.

잉크가 묻은 검은 오른손이 검은 왼손을 닦는다.

하얀 물티슈가 잉크 범벅이 되었다.

기름유출사고로 수면의 검은 기름을 닦아낸 수건.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일개 공무원은 이제 일이 다 끝나 나에게 무심해 보였다.

나는 다 쓰지 않은 물티슈가 아까워서 돌려드리려 했다.

쭈뼛쭈뼛하니

"저 이거.."

그제야 아직 가지 않았냐는 듯 바라보며

"이제 2차로 화장실 가서 닦으면 되는데."

"아니 그.. 다 안 써서.."

"아 이리 주세요."

그리고는 살짝 웃어 보였다.

마지막 친절.

일개 공무원으로서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친절 같았다. 

민원실을 나와 화장실로 갔다.

비누로 씻어도 완벽하게 지워지진 않았다.

다시 깨끗해질 순 없을 것 같았다.

화장실에서 나와 밖으로 나가는 길에

투표소 내부가 보였다.

곧? 나도? 내가? 머지않아?

일개 공무원 앞에서 나는 곧 '등록된' 성인이 될 일개 청소년.

일개 성인이 되어 1개의 표를 던진다.

"소중한 한 표"?

왠지 모를 크고 거대한 것 앞에서 무력해진다.

방금 나는 무엇을 만나고 왔나?


눈나안쓴네모씌

sourceoftaxati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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