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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파이 Jun 19. 2024

21세기 포퓰리즘(Populism)의 대륙

김가빈


 포퓰리즘(Populism)은 Populus(대중)와 ism(주의)이 합쳐져서 생겨난 용어로, 간단히 말해 ‘대중을 위한 정치’를 추구하는 사상이다. 사회구성원 다수의 권익 보호, 소수의 엘리트 계층에 대한 배척, 정부와 국민의 직접적인 연결이라는 개념을 토대로 만들어진 사상이 바로 포퓰리즘인 것이다.


 포퓰리즘은 먼 옛날부터 존재했으나, 근현대에 들어서 민주주의의 발전과 함께 세계적인 유행으로 자리매김했다. 20세기의 그 정점에 이르렀다고 평가받는 포퓰리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으며 곳곳에서 성행 중이다. 이번 기사에서는 21세기 포퓰리즘 체제가 가장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라틴아메리카와 포퓰리즘


 사회 기저에 깔린 불평등, 계속되는 경제 침체, 인종 간의 갈등: 건국 직후부터 대다수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이런 일련의 위기에 맞닥뜨렸고, 결국엔 잠식당했다. 어스름은 세기가 넘게 지속됐으며 민중들은 그들을 옭아맨 멍에에 점차 익숙해져 갔다. 그러던 20세기, 많은 국가에서 독재가 종식되고 민주주의가 도래하기 시작했다. 민중들의 입장에선 상상치 못했던 희망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었다. 

착취당하는 민중을 묘사한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투표권을 손에 쥔 민중들은 ‘민중이 곧 국가이다’라고 주장하는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에게 희망을 걸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라틴아메리카 곳곳에서 포퓰리스트 정부가 수립되기 시작했고 오늘날까지 계속될 하나의 기조가 비로소 형성되었다.

20세기 멕시코의 대표적인 포퓰리스트 대통령, 라사로 카르데나스(Lázaro Cárdenas)

 포퓰리즘에는 크게 두 가지 갈래가 있는데, 하나는 우익 포퓰리즘이고 다른 하나는 좌익 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이 대대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던 20세기 후반에는 우익 포퓰리스트들이 인기를 얻었다. 이들은 당시 유행이었던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도입했으며, 사회적으로는 다수 집단을 우대하고 소수 집단을 배척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신자유주의의 치명적인 부작용인 양극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실망했고, 이번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다는 좌익 포퓰리스트들에게 눈을 돌렸다. 하지만 좌익 포퓰리스트 정부 또한 라틴아메리카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발본색원하지는 못했으며 인플레이션으로 대표되는 경제적 혼란을 불러오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에게 ‘민중을 위하는’ 포퓰리즘은 여전히 희망이다. 만약 이들이 포퓰리즘을 포기하면 그동안 이루어졌던 복지가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으며, 최악의 상황에는 다시 억압받던 시대로 회귀할 수도 있다는 인식이 퍼져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라틴아메리카 경제가 큰 타격을 받으며 포퓰리즘에 대한 지지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이제부터는 몇 가지 사례를 통해 포퓰리즘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알아보겠다.


아르헨티나: 페론주의의 영욕


 20세기 중반, 정치적으로 선진화되어 있었던 아르헨티나에서는 포퓰리스트 후안 페론(Juan Perón)이 빈부격차에 신음하던 시민들의 막대한 지지를 등에 업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집권 중 복지 증진, 외국 자본 국유화 같은 정책을 폈고 페론주의를 정립했다. 그러던 1976년,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Jorge Rafael Videla) 사령관이 쿠데타를 일으키며 7년간의 군부독재가 막을 올렸다. 동시에 페론주의는 부정되었으며, 페론주의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일순간에 탄압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후안 페론, 페론주의의 창시자

 1983년, 포클랜드 전쟁의 패전으로 말미암아 군부독재가 막을 내리고 민주주의가 다시금 도래했다. 이는 페론주의가 중흥할 완벽한 무대가 형성됐음을 뜻했다. 그리고 그 시초로 1989년 보수적인 페론주의자였던 카를로스 메넴(Carlos Menem)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그런데 메넴이 민영화와 같은 페론주의와 상충하는 정책을 펼쳤기에 그를 페론주의자로 보지 않는 시각도 존재한다.) 


 메넴이 임기 말 경제를 말아먹자 아르헨티나 민중들은 진보적인 페론주의자였던 네스토르 키르치네르(Néstor Kirchner)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는 임기 중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성장시켰으며, 복지 증진 같은 방법으로 사회의 불평등을 해소하는데 이바지했다. 영광의 나날들이었다. 이 무렵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는 민중들이 키르치네르와 페론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는 모습을 어렵잖게 볼 수 있었다. 

46대 대통령 카를로스 메넴(우)과 48대 대통령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좌)

 그러나 2010년대에 이르러 경제 침체의 먹구름이 아르헨티나를 뒤덮기 시작했다. 가속도가 붙은 채 추락하는 경제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물가와 서글픈 대조를 이루었다. 복지로 인한 막대한 정부 지출을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중앙은행에서 돈을 찍어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던 것이었다.

 

 2019년 또 다른 페론주의자인 알베르토 페르난데스(Alberto Fernández)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그는 국난을 극복하기는커녕 아르헨티나 경제를 더 깊은 수렁으로 빠뜨렸다. 2023년 9월 전년 대비 물가 상승률 140%라는 경이로운 수치를 기록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아르헨티나 민중들은 결국 페론주의에 등을 돌렸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오벨리스코 앞에 운집한 시위대

 2023년 12월, 경제학 전문가 출신의 자유지상주의자 하비에르 밀레이(Javier Milei)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그가 포퓰리즘의 부작용을 해결하고 경제를 다시 정상궤도에 올리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러나 밀레이 또한 우익 포퓰리스트라고 평가된 만큼, 아르헨티나의 미래는 아직 미궁 속이다.


베네수엘라: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처절한 배신


 베네수엘라는 1958년 민주주의를 이룩했고, 곧이어 고질적인 불평등과 경제의 불안정을 해결하겠다고 천명한 포퓰리스트 정부가 탄생했다.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Carlos Andrés Pérez)로 대표되는 베네수엘라의 포퓰리스트들은 이후 경제적, 사회적 부문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긴 했지만 석유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20세기 말 신자유주의가 도입되면서 양극화가 심화됐고, 분노에 찬 민중들이 거리에 나와 시위를 벌이는 형국이 지속되었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걷힐 기미를 보이지 않던 1992년 2월, 수도 카라카스의 거리에 한 무리의 군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의 정체는 우고 차베스(Hugo Chávez) 중령이 이끄는 쿠데타군으로, 개혁을 호소하며 정권을 전복시킬 셈이었다. 이 날, 쿠데타군은 정부군과 시가전까지 벌였지만 중과부적에 상황에 처했고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역적의 우두머리’인 차베스는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그런데 한낱 실패한 쿠데타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후일 베네수엘라의 역사가 뒤바뀌게 된다.

쿠데타 직후 기자회견을 하는 우고 차베스

 쿠데타의 주범인 우고 차베스가 슈퍼스타가 된 것이었다. 카라카스 시내를 장악한 한나절 동안 ‘빈곤 타파’와 같은 구호를 연신 외쳐 댔던 중령 차베스는 베네수엘라 민중들의 입장에서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 같은 ‘해방자’로 보였다. 그렇게 해서 차베스는 1998년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당선된다.


 대통령이 된 우고 차베스는 볼리바르 혁명(Revolución bolivariana)이라 불리우는 일련의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기업의 국유화, 토지의 재분배, 교육 확대 같은 정책들을 시행됐으며 유가상승과 함께 경제 사정 또한 나아졌다. 비로소 ‘민중의 유토피아’가 들어선 베네수엘라에서 이제 혁명은 순항을 멈추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차베스와 그의 지지자들

 그러나 차베스의 이런 사회주의적이고 포퓰리즘적인 정책은 석유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으며, 결국 세계적인 유가 하락으로 인해 베네수엘라의 경기 침체가 닥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베스는 복지를 줄이지 않았다.


 베네수엘라 경제는 2013년 차베스가 지병으로 숨을 거두고 후임인 니콜라스 마두로(Nicolás Maduro)가 집권한 뒤부터 본격적인 위기를 맞게 된다. 2015년의 유가 하락은 늘 그래왔듯이 베네수엘라에 경기 침체를 불러왔으며, 공공 정책 비용의 충당을 위해 중앙은행에서 화폐에 대한 대대적인 평가절하를 실시하자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한 것이었다. 

쓰레기를 뒤지며 생계를 유지하는 베네수엘라 국민들

 베네수엘라의 경제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올해 11월 기준 누적 물가 상승률이 182%를 기록했으며, 물가에 비해 국민들의 소득 수준이 매우 낮기에 대다수의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기본적인 생활도 영위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21세기 베네수엘라의 참상은 특정 산업에 대한 과한 의존과 무분별한 복지의 위험성을 몸소 보여준 안타까운 사례이다.


볼리비아: 포퓰리즘과의 위태한 동행 


 볼리비아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원주민과 메스티소(원주민·백인 혼혈)는 건국 이래 소수의 백인 지도층에 의한 지배를 감내하며 살아가야 했다. 그러던 20세기 초, 원주민의 권리 증진을 추구하는 사상인 인디헤니스모(Indigenismo)가 볼리비아 전역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인디헤니스모는 이후 볼리비아의 유구한 체제의 변혁을 불러왔으며 1954년 수립된 민주적인 포퓰리스트 정부의 밑거름으로써 작용하게 된다.

20세기 초 볼리비아 원주민들의 모습

 빅토르 파스 에스텐소로(Víctor Paz Estenssoro)가 이끄는 신생 포퓰리스트 정부는 토지 개혁, 해외 자본 국유화 같은 급진적인 정책들을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야심 차게 추진했던 일련의 개혁은 미국의 압박, 내부 분열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맞닥뜨리며 상당 부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게다가 1964년 군부 독재가 시작되며 볼리비아 ‘민중 정치’의 불씨는 완전히 꺼지게 된다.


 1985년 군부독재가 끝나고 민주주의 체제가 다시 들어섰으며, 신자유주의를 추앙하는 우파 포퓰리스트들이 연이어 집권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들이 도입했던 신자유주의는 경제를 어느 정도 발전시키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의 불평등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런 상황은, 불평등에 진절머리가 났던 볼리비아 민중들에게 매우 심각하게 다가왔다.

노동자의 권리 증진을 요구하는 시위대

 2006년, 비로소 정권이 교체됐다. 새로이 대통령궁의 주인이 된 이는 좌파 포퓰리스트이면서 인디헤니스모와 사회주의를 주창했던 원주민 출신의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였다. 그는 집권 시작과 동시에 대대적인 복지 증강, 천연자원 국유화 같은 급진적인 개혁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볼리비아의 빈부격차는 현격히 줄었으며, 천연자원 덕분에 경제도 눈에 띄게 발전했다.

에보 모랄레스

 이후 모랄레스는 2009년에 재선, 2014년에 3선에 성공하며 장기집권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그동안 모랄레스를 장식해 왔던 화려한 미사여구가 무색하게도, 점점 포퓰리즘 정권의 문제점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천연자원에 의존적인 경제는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탄압받았던 중산층들의 반발이 일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러던 2019년, 4선에 도전한 모랄레스가 부정선거를 행했다는 의혹이 일파만파 퍼지게 된다. 이에 대해 결백을 주장했던 모랄레스였지만 곳곳에서 시위가 발생하고 군부까지 동요하자 결국 사임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장 14년에 걸친 모랄레스 체제가 종언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2019년 대통령 선거 직후 일어난 시위

 이와 같은 불상사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민중들은 여전히 모랄레스 집권기를 그리워하고 있으며, 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 모랄레스와 비슷한 성향의 루이스 아르세가 당선된 바 있다. 과연 볼리비아에서 포퓰리즘이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기 위해선 적잖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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