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승준
아무도 관심 없는 시사 상식 2탄이다. 미국에는 유독 음모론자들이 많다. 그들이 주장하는 음모론들을 들어보면, 정부가 가난한 흑인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한다든가, CIA가 적국에 몰래 무기를 팔아 수입한 마약으로 비자금을 조성한다든가, 혹은 정부가 국민의 기억 조작을 시도한다든가, 하여튼 허무맹랑해 보이는 것들이 많다. 그런데 앞에 언급한 사례는 정말 놀랍게도 미국에서 실제로 발생한 사례 (터스카기 생체실험 사건, 이란-콘트라 사건, MK-울트라 프로젝트)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국가가 미국인데, 자국민들이 음모론을 믿지 않고 배기겠는가? 오늘은 음모론의 모든 요소가 총집합된, 커티스 르메이의 말마따나 인류를 다시 석기시대로 돌려놓을 뻔한, 믿기 어려운 미군의 실제 작전을 소개하고자 한다.
무려 중사 신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헤라르도 모랄레스의 독재정부를 무너뜨리고 쿠바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른 풀헨시아 바티스타는 친미 정책을 바탕으로 공격적인 개발을 이어가며 교육을 확대시키고 빈국이었던 쿠바의 GDP를 남유럽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등의 성공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군인 출신이면서 정작 군사 영역에서는 무능한 모습을 보였으며 재임 말년에는 문맹률이 40%를 기록하는 등 빈부격차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벌어졌고, 이에 1953년 그 유명한 피델 카스트로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바티스타를 끌어내리고 권좌를 차지한다.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최초로 일어난 사회주의 혁명이며, 피델 카스트로의 1959년부터 2009년 혹은 2011년까지 50년가량의 파란만장한 독재자 생활의 도화선이 되었다.
1959년 쿠바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피델 카스트로는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여러 서방계 자본을 쿠바에서 내쫓았으며 쿠바 내 미국인의 사유재산을 몰수하는 등의 제재를 가했고, 이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경제적 압박 강화로 맞섰다. 끝없이 나빠진 양국의 사이는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손상되었고, 결국 아이젠하워 퇴임을 20여 일가량 남겨둔 1961년 1월 3일 미국은 쿠바와 국교를 단절하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퇴임을 1년 남겨둔 1960년 쿠바 전역에 반공 게릴라를 투입하여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키는 '피그만 침공'을 계획하였는데, 타 정부기관의 간섭 등으로 소규모 게릴라 작전이 대규모 침공 작전으로 변경되었다. 이 과정에서 CIA의 여러 차례 파행으로 폭격 계획이 취소되고, 무엇보다 보안이 허술해져 쿠바 정권이 침공 작전을 알아차리는 바람에 후임 대통령 존 F. 케네디 정권에서 그만 실패에 이르고 만다. 이 작전은 케네디에게 왜 정보기관과 군부를 섣불리 믿으면 안 되는지에 대한 교훈만 전해주었고, 일차적으로 미국의 침공은 막아냈으나 정권 붕괴의 위협을 단단히 느낀 카스트로는 냉전으로 인해 한창 미국과 안 좋은 소련에게 SOS를 청하게 된다.
그리고 이 SOS는 하마터면 전 인류가 삼천 년 전으로 퇴보할 뻔한 전 세계적 안보 위협, 쿠바 미사일 위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이 기사에서 설명하기에는 이해관계가 너무 복잡하고, 무엇보다 글 쓰는 내가 이 기사에 그걸 다 쓸 시간이 없으므로 궁금하다면 마이클 돕스의 역사서 [1962]나 로저 도널드슨 감독에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영화 [D-13] 등을 감상하는 것을 권한다.
한편 피그만 침공이 실행되기 한 달 전인 1961년 3월, 아이젠하워의 뒤를 이어받은 JFK는 CIA와 미군과 함께 나름대로 피델 카스트로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 미 국방부에서 고안한 일명 '노스우드 작전'이 그의 책상 위로 배달되는데 이는 현실이 된 음모론의 최고봉으로서 영원히 전설로 남게 된다. 노스우드 작전을 쉽게 설명하면 :
미국이 아무런 명분 없이 쿠바를 침공하면 WWIII 발생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미국이 쿠바를 쳐들어갈 만한 명분을 만들자.
그 명분은 바로 '의도적인 자국민 학살'이며, 항공기 테러 조작이나 총기난사 사건 조작, 의도적 비행기 자살 테러 등으로 행한다.
와 같다. 이 안건은 리먼 렘니처 미국 합참의장이 제안하고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와 JFK에게까지 올라갔는데, 이 둘은 당연히 그 비인간성에 탄성을 금치 못하면서 바로 거부하였다. 또한 JFK는 이 안건을 거부하면서 쿠바에 대한 대규모 군사작전을 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하였다.
몽구스 작전은 본래 노스우즈 작전과는 별개로 진행되고 있었으나 1962년 피그만 침공의 실패 이후 노스우즈 작전과 결합한 형태로 등장한 작전이다. 재임 당시 피그만 침공의 실패로 이미지에 큰 타격을 본 JFK를 위해 상황 반전 카드로 친히 미 국방부가 다시 한번 제시하였다. 노스우즈와 어이없는 정도가 맞먹는, 역시 정신 나간 이 작전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마타도어 (흑색선전)를 통해 쿠바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국제사회에 각인시킨다.
그 후 쿠바인으로 위장한 요원들이 미국 관타나모 해군기지를 습격해서 군함을 파괴하고 시설을 훼손한다.
희생자 수를 과장하여 신문에 싣고 전 국민적 분노를 이끌어내 그를 토대로 선전포고한다.
민간인 학살 작전을 반려시켰더니 이번에는 미군 학살 작전을 들고 온 렘니처의 창의력에 맥나라마와 JFK는 경탄하였고, 이 말도 안 되는 작전 역시 구체화 도중 렘니처가 미국 합참의장직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이끌었던 장군 출신으로, 그 시절 미국 군부와 군수기업들의 비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가 내세운 주요 공약 중 하나가 바로 6.25 전쟁의 종전이었으며, 휴전협정까지 유도해 낸 그는 본격적으로 군부의 예산을 대폭 삭감하였다. 그는 재임 후반기에 군산복합체, 즉 군부와 산업체가 결합한 거대 이익 집단의 도래를 경고했기 때문에 군부가 후순위로 밀려나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군부의 반발은 5성 장군 및 WWII 연합군 총사령관까지 지낸 아이젠하워에게는 소 귀에 경을 읽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던 중 1961년 군에서 중위를 역임한, 군부 입장에서는 만만해 보이는 케네디 행정부가 출범하였다. 군부로서는 쿠바 사태가 반공주의를 다시금 고취시켜 전쟁을 통해 그 위상을 되찾을 절호의 기회였으므로 그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약간의 희생'은 기꺼이 감수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신임 행정부 길들이기와 영향력 확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필사적인 미군의 상황은 후의 쿠바 미사일 위기 사태에서도 잘 드러난다.
자국민에게 자작극 테러를 가하고, 그를 빌미로 적을 공격한다는 이 정신 나간 계획은 음모론이 가정하는 전형적 사안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원래 1997년 11월 케네디암살조사위원회에서 기밀을 해제하여 대중에게 공개되기는 하였으나 그때 당시에는 큰 반향을 불러오지 못했고, 2001년 저널리스트 제임스 뱀퍼드가 NSA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저서 [비밀의 몸통]에서 언급하며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상술한 노스우즈 작전과 후술 할 몽구스 작전은 훗날 2001년 9.11 테러 발생 후 수없이 많은 음모론이 양산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