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ML과 공연자 간 갈등으로부터 이우고 공연 문화의 현주소를 묻다/신재이
활발한 공연 문화는 이미 이우학교의 익숙한 풍경이 된 지 오래다. 학생들이 직접 계획하고 연습하여 올리는 댄스, 밴드, 연극 등의 무대가 달에 한두 번씩은 올라오며 큰 호응을 이끌어 낸다. 공연 문화에 공연자 혹은 관객으로 참여하면서 학생들은 자신의 재능과 흥미를 발휘할 기회를 얻고, 특별한 순간들을 경험하기도 하고, 서로의 빛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애정을 쌓아 가기도 한다. 이때 실내 공연을 더 극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빠져서는 안 되는 요소가 있는데, 바로 ‘콘솔’이다.
‘콘솔’은 컴퓨터나 전기ㆍ통신 기기 따위의 각종 스위치를 한 곳에 모아 제어할 수 있도록 한 조정용 장치를 뜻하는데, 이우학교 내에서는 보통 신학습관 지하 강당(이하 ‘신학지’)에 설치된 조명 및 음향 기기를 이르는 말로 사용된다. 현재 시점에서 콘솔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담당 교사와 콘솔 동아리 CML(Console is My Life의 약자.)의 부원뿐이다. 그런데 콘솔을 둘러싼 여러 특수한 상황들과 규칙들로 인해 CML과 공연팀 사이의 갈등이 빈번히 발생하는 듯하다.
이 기사에서는 어떻게 지금과 같은 콘솔 운영 체제가 자리 잡게 되었는지 간략하게 살펴본 다음, CML 부원들과 공연자들이 어떤 고민과 갈등을 겪고 있는지 다루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이우학교의 공연 문화가 ‘교육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인지 질문하며 글을 마무리하겠다.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CML 부원 및 공연 경험이 있는 학생 총 5명을 인터뷰했다. 인터뷰 참여자들에게는 취재의 목적과 내용을 미리 알렸으며, 이름 공개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기보다 재구성하여 글로 풀어내는 쪽을 택했다. 이때 큰따옴표(“”)와 함께 제시된 어구는 인터뷰이의 표현을 그대로 빌려 온 것임을 밝힌다.
2022년까지 콘솔은 특별한 관리의 대상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가벽으로 이루어진 콘솔 부스는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누구든지 조명 및 음향 연출을 경험해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선배나 친구에게 기기를 쉽게 배워 조작할 수 있었다. 때문에 공연을 준비하는 대부분의 공연팀 내에는 콘솔 기기를 다룰 줄 아는 학생이 포함되어 함께 공연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교무실과 행정실에서는 꾸준히 기기 관리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기기에 대한 전문적이고 세밀한 지식이 충분하지 않은 학생들이 잘못된 방법으로 기기를 조작하여 자주 고장이 발생했던 것이다. 콘솔 수리 비용으로 한 해당 지출되는 예산이 수백에 달하니 교사회에서는 교사 동반 없이 콘솔 부스에 출입할 수 없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었다. 그러나 해당 계획을 전해 들은 몇 학생들은 콘솔 사용의 자유도가 대폭 축소되면 공연 문화가 위축될 것이라 우려했다. 그들은 ‘콘솔 담당제’를 대안으로 제시하였고, 대안이 교사회에서 받아들여져 2023년 한 학기 간 시행되게 되었다. 콘솔 담당제는 직접 졸업생에게 교육을 받아 콘솔을 잘 다룰 수 있는 몇몇 학생들 중 최소 한 명의 동행이 있어야 콘솔 부스를 사용할 수 있게 한 규칙이었다. 변화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지속적인 담당자 양성과 더 안정적인 콘솔 운영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작년 콘솔 담당자를 맡았던 학생들 일부가 주축이 되어 CML 동아리를 만들면서, 올해에는 CML을 중심으로 하는 콘솔 운영 체제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는 CML 소속 학생만이 콘솔을 조작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공연자들이 조명 및 음향 기기를 통한 무대 연출을 하기 위해서는 CML에게 공연 신청 구글폼을 제출하고, 음향 및 조명 큐시트를 첫 리허설 10일 전까지 보내야 한다. 공연 의뢰를 받으면 CML은 내부 상의를 거쳐 공연팀에 필요한 부원을 배정한다. 이 외에 신학지 조명 및 음향 효과를 사용하기 위한 다른 방도가 현재로서는 없다.
그러나 큐시트 작성 규칙에 관하여 CML과 공연자 간 갈등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공연팀이 콘솔 사용을 의뢰했을 때 CML은 의뢰를 수락할지, 말지에 대한 결정권 없이 무조건 이에 응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CML은 현재 교내 동시다발적으로 준비되고 있는 모든 공연들의 무대 연출을 담당하고 있으며, 자신의 일정에 맞춰 공연 참여를 조절하기보다 공연 준비 일정에 자신의 일정을 맞출 수밖에 없다. 특히 많은 공연 일정이 집중되는 학기말과 축제 시즌에는 여러 개의 공연 리허설에 동시에 참여해야 하므로 개인 시간을 과하게 소모하게 된다. 인터뷰 중에 한 CML 소속 학생은 “인권 유린”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개인 시간 확보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토로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CML이 조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콘솔 규칙뿐이다. 만약 공연자가 공연의 완성도를 위해 밤낮으로 리허설을 진행하거나 매우 복잡한 연출을 요구한다면 CML은 자신의 일상을 안정적으로 지켜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착취되지 않을 권리”를 위해 엄격한 규칙을 적용하기로 했다. CML은 현재 공연 의뢰 과정에서 큐시트 형식, 조명 큐 최대 개수, 큐시트 제출 기한 등에서 오류가 있으면 의뢰를 수용하지 않고 있으며, 의뢰 내용으로부터 크게 벗어나는 수정을 공연 준비 중도에는 할 수 없다고 정하고 있다. 더불어 CML은 자신들을 ‘서비스 제공자가 아닌 같은 공연자이자 예술인으로 대해 달라’고 공연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본인들이 단순 시설 관리자가 아닌 교육 활동에 임하는 학생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몇몇 공연자들은 이러한 CML의 태도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CML이 큐시트 작성이나 제출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실수”에 대해서도 공연을 맡을 수 없다는 완고한 입장을 취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뷰에 응한 공연자들은 CML이 “사람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실수들에 단 하나의 예외도 허락하지 않는다”며 공연 과정에서 겪었던 갈등의 순간들과 답답함을 설명했다. 어떤 공연자는 규칙의 존재 이유에 대한 회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규칙은 더 좋은 공연 문화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도구와 같은 것인데, 현재 콘솔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은 “규칙과 그 목적이 전도된 상황”이라며 CML이 필요 이상으로 원칙적이라는 의견을 전하였다. 어떤 CML 부원은, 자신은 “이 정도로 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지만 규칙이 엄격한 현재에도 상당한 피로감이 있는 터라 이 사태에 대해 고민이 크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콘솔 규칙이 강화되기 전까지 무대 연출은 공연팀의 공연 준비 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한 부분이었다. 따라서 조명 및 음향 요소 역시 무대 퍼포먼스처럼 팀 내에서 여러 차례의 의논을 통해 점차 다듬어지며 완성되고는 했다. 오랫동안 무대 연출에 참여하여 기기를 다루는 데 능숙해진 학생들도 있었지만, 연출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학생들이 공연 준비를 기회로 점차 실력을 쌓아 가는 경우도 잦았다. 그러나 초보 학생들의 탐구 과정은 기기 손상과 과도한 예산 지출의 치명적인 이유가 될 수밖에 없었고, 무대 연출이라는 부분은 통째로 공연 준비 과정에서 떨어져 나와 공연팀의 일원이 아닌 CML이 일임하게 되었다. 공연자 입장에서는 “우리 공연”의 큰 부분을 “남”이 담당하게 된 것이다. 최선을 다해 멋진 공연을 올리고 싶은 공연자들은 CML에게 이런저런 희망사항을 요구하거나 숙련 과정에서 몇몇 실수를 일으키는 CML 부원을 탓하기밖에 할 수가 없다.
규칙에 의해 맺어지는 공연자와 CML 간의 관계는 목적이 있는 ‘갑을 관계’를 띤다. 이때 공연자는 공연팀을 ‘을’로, CML 부원은 CML을 ‘을’로 각각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공연자에게 CML은 눈치 보며 조심스럽게 부탁해야 하는 어려운 대상이고, CML에게 공연자는 무리한 요구를 하여 자신들을 자주 곤혹스럽게 하는 대상이다.
얼마 전 개최된 2024 이우고 축제 ‘반짝투어’의 공연 준비 과정에서도 학교 구성원들의 갈등은 여전했다. 축제 공연은 매년 축준위(축제 준비 위원회: 학교 축제를 준비하기 위해 학생들로 구성되는 준비위원회) 내 부서인 ‘공연팀’이 담당해 왔으나, 올해는 CML이 축준위와 함께 축제 공연을 꾸렸다. CML 부원들은 축준위와 대등한 수준으로 축제 회의와 공연 리허설에 참여해 밤늦게까지 역할을 다했다. 올해 축제에는 유난히 공연자 수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 여러 이해관계가 발생했다. 공연자들은 더 나은 공연 환경을 원했고, 축준위는 공연 장소를 확보해 공연자들을 여러 곳으로 분배하느라 애를 먹었고, CML은 연출 형식과 공연 시간에 제한을 걸었다. 때문에 축제 당일까지 축준위와 CML, 공연자 대표자가 있는 카카오톡 채팅방에서는 장문의 문의글과 답변글, 사과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갈등 상황의 발생은 CML의 잘못인가, 공연팀의 잘못인가? 이것은 한 명의 책임자를 지목함으로써 일목요연하게 설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듯하다. 연출을 배우고 싶어 동아리에 들어왔지만 여러 어려움과 맞닥뜨리게 된 CML, 멋진 공연을 올리고 싶다는 열정과 욕심을 가진 공연팀, 학생들에게 교육적 경험을 제공하는 동시에 교내 시설을 유지할 의무를 지닌 교사회와 행정실, 그리고 공연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 알지 못한 채 무의식적으로 더 ‘실력’ 있고 화려한 공연들에 열광하는 학생들. 여러 주체들의 다양한 이해관계가 맞물려 지금과 같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한 인터뷰이는 다른 방안이 없을까 오랫동안 고민해 왔지만 “아직 답을 찾지는 못했다”라고 말했다.
공연은 분명 즐거움으로 우리 곁에 남아야 한다. 그러나 취재하는 동안 만난 다섯 명의 인터뷰이들은, 호기심 많고 설레는 얼굴이 아니라 근심 많은 얼굴을 하고 인터뷰에 응했다. 어떤 학생은 거친 어조로 ‘할 수만 있다면 CML을 그만하고 싶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무대 위는 언제나 빛난다. 하지만 무대를 직접 만드는 사람들은 점점 소진되어 가고 있다. 더불어, 신학습관 지하 강당은 프로 무대가 아닌 학교 무대다. 따라서 이상의 문제 상황들을 학교라는 공간적 배경과 연관 지어 본질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공연과 관련된 일들을 ‘예술 분야에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덮어 두기보다 또 하나의 학교 문제로써 고민하고 공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학교가 잘 배울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명제이다. 이우학교는 이에 관해 ‘하나부터 열까지 학생이 직접 주도하는 배움의 장’ 마련을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여, 학생자치회나 동아리, 준비위원회를 통해 학교 운영의 많은 부분을 학생들의 몫으로 돌려주고 있다. 공연 문화 역시 학교 교육과정의 일부로 유지되고 있다. 현재는 사라진 교육과정이지만 ‘한여름 밤의 꿈’에 참여하며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과거 학생들은 협동심이나 창조성을 온몸으로 배울 수 있었다. 학교의 무대 장비는 가장 먼저 교육적 목적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잘 갖춰진 시설이라도 ‘좋은 배움’을 이끌어낼 수 없으면 안 된다.
우리는 학교 구성원으로서 다 함께 지금의 공연 문화가 충분히 ‘교육적’인지 지속적으로 성찰해야 할 것이다. 공연 문화에 참여하고 있는 학생들은 ‘좋은 배움’을 경험하고 있는가? 이우학교가 대안학교라면, 더 나아가 이러한 질문도 가능하다. 학생들은 현대 사회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기보다 ‘대안적’ 경험들을 통해 현시대에 가장 필요한 배움을 생산하고 있는가? 기계화된 ‘노동’을 하는 CML, 더 멋지고 ‘완벽’한 공연을 만들고 싶어 하는 공연자, 그리고 더 ‘완벽’한 공연에 더 뜨겁게 호응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와 닮아 있지는 않은가? 과정에서의 땀방울, 떨림, 열정, 환희, 공동체는 어느새 교육 현장에서 밀려나고 결과로써 눈에 보이는 것들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좋은 교육 현장이 그저 길을 트고 장을 연다고 해서 조성되지만은 않는다. 생애의 모든 순간에 나름의 배움이 있다고 해도, 그 배움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성찰하고 정교하게 조정할 의무를 학교 구성원들은, 특히 교육의 설계자인 교사회는 지니고 있다. 학생은 학교에서 노동자나 관리자가 아닌 배우고 성장하는 사람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훌륭한 퍼포머, 능통한 기술자이기에 앞서 선하고 주체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 학교 운영 과정에서 어떤 부분이 얼마나 학생 자치와 활동의 영역으로 주어질 수 있는지, 특히 어떤 경험들이 학생들을 올바르게 성장시킬 것인지에 대한 검토를 동반하며 교육과정은 운영되어야 한다. 급변하는 상황과 시대에 맞추어 고민을 거듭하지 않는다면 학교는 더 이상 ‘21세기 더불어 사는 삶’을 추구하는 학교일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학교의 공연 문화가 여전히 교육적으로 유효하려면 공연의 완성도보다 공연을 올리기까지의 과정들이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실수가 많은 엉성한 무대라 할지라도, 공연하는 학생이 어떤 마음으로 무대에 서기로 결심했고 관객들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었는지,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된 장면들은 어떤 것들이었는지 우리는 함께 지켜보고 격려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들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공유될 때 ‘좋은 배움’은 역동적으로 생겨나지 않을까. 그제야 비로소 공연자들과 관객들 모두는 배우는 사람이자 공연의 주체로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