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빈
중동 전쟁, 이라크 전쟁, 리비아 내전, ISIS, 이스라엘 - 하마스 전쟁, 그리고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는 시리아 내전까지···.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한 아랍에 대한 인상은 분쟁들로 가득하다.
오늘날 아랍에서 벌어지는 많은 분쟁은 아랍이 겪은 복잡한 현대사와, 그 과정에서 형성된 두 가지 주요 사상에서 기인했다. 하나는 아랍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주의 사상인 아랍 사회주의(الاشتراكية العربية, Arab socialism)이고, 다른 하나는 이슬람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주의(إسلاموية, Islamism)이다.
이번 기사에서는 아랍 사회주의와 이슬람주의 간의 대립이라는 맥락을 통해 아랍 현대사의 흐름을 조명하고자 한다.
‘아랍’이라는 정체성이 두드러지는 아랍 사회주의는 아랍의 민족주의 사상인 아랍 민족주의(القومية العربية, Arab Nationalism)에서 기원하였다. 아랍 민족주의는 16세기부터 이어진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배에 맞서기 위해 제시된 사상으로, 제국의 쇠퇴가 본격화된 19세기부터 아랍 전역에서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발발과 함께 오스만 제국이 추축국에 가담하자 협상국의 일원이었던 영국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아랍과 손을 잡았다. 1915년 영국은 후세인 - 맥마흔 서신(McMahon–Hussein correspondence)을 통해 아랍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킬 시 전후 아랍 민족의 독립된 국가 건설을 지원하겠다고 천명했으며, 이에 동의한 하자즈(ٱلْحِجَاز, 아리비아 반도의 동부 서부 해안 지역)의 아랍 군주 후세인 빈 알리(ٱلْحُسَيْن بِن عَلِي)가 실제로 반란을 일으켰다.
1918년, 많은 아랍인의 염원 대로 오스만제국이 패망했다. 이제 남은 수순은 상술한 약속대로 아랍인들만의 독립된 국가가 탄생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은 곧 무참히 깨지고 만다. 아랍 세계가 ‘유럽’이라는, 타자의 지배 아래에 다시 한번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1916년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을 통해 아랍 영토를 분할 통치하기로 이미 합의를 끝낸 상태였다. (한술 더 떠 비슷한 시기 영국은 밸푸어 선언을 통해 아랍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원하기로 약속까지 하였다.)
이는 독립을 열렬히 희구하던 당대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에게 명백한 배신이자 부조리로 여겨졌다. 때문에 이들은 아랍인들의 주체적인 독립 달성을 목표로 설정하게 되는데, 이때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사상이 바로 사회주의였다. 봉건적 경제구조와 식민 경제가 초래한 극심한 불평등, 그리고 식민지 열강에 맞선 반제국주의 정서가 사회주의의 반제국주의, 평등주의와 결합되어, 일견 아랍 독립을 위한 완벽한 주춧돌로 보이는 사상이 탄생했던 것이다.
아랍 사회주의를 최초로 주창한 인물은 시리아의 미셸 아플라크(ميشيل عفلق)였다. 식자층 출신으로 1930년대 파리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던 그는 공산주의에 매료되었고, 이후 시리아로 돌아와 아랍 사회주의 정당인 아랍 사회주의 부흥당, 속칭 바트당(حزب البعث)을 창당하고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그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인데, 이는 아랍 사회주의가 종교가 아닌 민족으로서의 아랍을 강조했다는 점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를 받던 아랍 국가들은 하나둘 독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립 후에도 열강들은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기존의 지배계급이 청산되지 않은 탓에 고질적인 불평등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는 국민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52년 7월 23일, 아랍 현대사에 큰 파고를 일으킨 하나의 격변이 이집트에서 발생했다. 아랍사회주의 성향의 가말 압델 나세르(جمال عبد الناصر حسين)를 중심으로 한 소장파 장교들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었다. 이집트 혁명(الثورة المصرية)으로 일컬어지는 이 사건으로 이집트에는 왕정이 무너지고 아랍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섰으며, 구체제가 배태한 내부 모순을 실감하던 다른 아랍 국가들 또한 큰 영향을 받게 된다.
1954년 정권을 장악한 나세르는 적극적으로 사회주의 정책을 펼쳤다. 토지 개혁, 복지 확대 등을 단행했으며, 1956년에는 영국 소유였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였다. 또한 그는 아랍 사회주의의 목표 중 하나였던 아랍 민족의 통일을 실현시키기 위해 1958년 시리아와 통합, 아랍 연합 공화국(الجمهورية العربية المتحدة)을 설립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내부 갈등으로 3년 만에 해체되었다.
1958년, 이번에는 이라크에서 나세르의 정책에 영향을 받은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7월 14일 혁명(انقلاب 14 تموز 1958)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왕족과 총리 등 지배계급이 일거에 제거당했으며, 이후 이라크는 급진적인 체제 변화를 겪게 된다.
이집트와의 연합이 해체된 이후의 시리아에서는 1963년 미셸 아플라크의 바트당을 지지하는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으며, 60여 년간 이어질 바트당 일당독재의 서막이 열린다.
바트당의 부상은 시리아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다. 1968년 바트당 소속의 장군 아흐메드 하산 알바크르(أحمد حسن البكر)와 군부 출신은 아니었지만 정계에서 적잖은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사담 후세인(صدام حسين)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고, 바트당의 집권이 시작된다.
같은 시기 아프리카의 리비아와 알제리 또한 강경한 아랍 사회주의의 기조를 이어받아 체제를 구축했다. 알제리의 경우 프랑스에 맞서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국민해방전선(جبهة التحرير الوطني, 약칭 FNL)의 일당 체제가 탄생하였고, 리비아에서는 1969년 무아마르 카다피(معمر القذافي)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였다.
1960년대 말, 당시 절정에 달해있던 아랍 사회주의의 위세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바로 1967년 아랍 연합과 이스라엘 사이에 발발한 제3차 중동전쟁이었다.
유대인들의 국가였던 이스라엘과 아랍 내셔널리즘의 기치 아래 똘똘 뭉친 아랍 국가들의 대립 속에서 발발한 이 전쟁의 결과는 아랍의 완패였다. 아랍 국가들은 전쟁 발발 6일 만에 항복했으며,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를 잃어야 했다. 그리고 이처럼 말로는 주야장천 유대인의 축출과 아랍의 단결을 외치면서 실제로는 무력하게 당하기만 하는 아랍사회주의 국가들의 모습은, 체제의 신뢰성에 타격을 가하기에 충분했다.
또한 이때까지 아랍사회주의 국가들의 맹주 역할을 했던 이집트는 1970년 나세르의 사망 이후 집권한 안와르 사다트(أنور السادات)가 미국, 이스라엘과 관계를 개선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전격적으로 비판받기 시작했다. 물론 이는 국익을 고려한 결정이었지만, 많은 이들에게 사다트의 정책 기조는 아랍사회주의의 본령인 반제국주의를 무시하고 철천지원수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처사로 여겨졌다.
아랍사회주의 국가들이 지닌 또 하나의 문제점은 독재였다. 모든 국가에서 체제 유지를 위해 철권통치를 이어갔으며,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묵살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자유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커질수록 독재는 더욱 강화되었다. 1982년, 시리아 대통령 하페즈 알아사드(حافظ الأسد)는 이슬람주의 조직을 섬멸하겠다는 명분으로 하마시를 공격, 수만 명의 시민을 학살했다. 또한 1979년 집권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반대세력에 대한 숙청을 실시함과 동시에 두자일, 안팔 등지에서 무차별적 학살을 자행했다.
그리고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아랍사회주의의 대항마로 떠오른 사상이 바로 이슬람주의였다.
‘이슬람 근본 교리로의 회귀’를 본령으로 내세우는 이슬람주의는 18세기 이슬람 세계의 쇠퇴라는 역사적 배경 속에서 태동하였다.
초기 이슬람주의 운동을 이끈 인물은 18세기 나즈드(نجد, 아라비아 반도 중부 지역) 출신의 수니파 신학자 무함마드 압둘 이븐 알와하브(محمد بن عبد الوهاب)로, 그는 낡은 서고 한편에 방치되어 있던 초기 이슬람 사상을 발굴, 유행시키며 당대 아랍의 종교와 정치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파인 와하브파는, 그가 죽은 후에도 수니파 무슬림들 사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하며 이슬람주의의 주축을 이루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이 아랍에 손을 뻗자 이슬람주의는 아랍 전역에서 크게 유행하게 된다. 지식인, 군인 등 서구식 교육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제국주의 극복의 방편으로 사회주의를 택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전통적인 가치관을 고수하며 살아가던 많은 아랍인들은 ‘이슬람 낙원 건설’이라는 캐치프라이즈에 경도되었다.
1928년, 이집트에서 하산 알 반나(حسن البنا)에 의해 무슬림 형제단(الإخوان المسلمون)이 결성되었다. 이슬람의 통합, 제국주의 추방,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슬람 본위의 사회 건설이라는 구호를 내건 무슬림 형제단은 설립과 동시에 큰 인기를 얻었고, 곧 아랍 최대의 이슬람주의 단체로 자리매김한다.
또한 1950년대 이후 아랍의 많은 나라들이 공화제로 변하기 시작하자, 위험을 감지한 왕정 국가 사우디아라비아는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와하브파 이슬람주의를 강조하기 시작한다.
종교가 아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강조하고, 이에 따라 세속주의를 추구하는 아랍 사회주의와 이슬람주의의 대립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었다.
두 사상 사이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발생했던 곳은 1952년 이집트 혁명 이후 아랍 사회주의 체제가 자리 잡은 이집트였다. 상술했다시피 당시 이집트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이슬람주의 단체는 무슬림형제단으로, 이때는 반나보다 한층 더 강경한 인물이었던 사이드 쿠틉(سيد قطب)에게 수장 자리가 넘어간 상황이었다.
2년간의 미국 유학을 통해 반이슬람적인 서구 헤게모니를 몸소 경험했던 쿠틉은 이슬람 전통 질서를 배격하는 정책을 펼치던 아랍 사회주의 신정부가 더없이 못마땅했다. 따라서 그는 1954년 나세르 암살을 기도하는데, 이는 실패하였고 쿠틉을 포함한 수많은 무슬림 형제단원들이 검거, 투옥된다.
그런데 감옥에 갇힌 쿠틉의 저술이 대중에 공개되며, 그는 이집트 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으며 마찬가지로 이슬람주의 또한 유행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현상을 좌시할 수 없었던 나세르는 1965년, 또 다른 죄를 뒤집어 씌워 쿠틉을 사형시킨다.
쿠틉 사후에도 이집트에서 무슬림 형제단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주의 열풍은 계속되었으나, 나세르는 이들의 정치 참여를 철저히 금지하고 탄압했다. 무슬림 형제단의 정치 참여가 허용된 시기는 나세르 사후 집권한 사다트 대통령 집권기로, 이 같은 사다트의 온건적 정책 덕분에 이슬람주의와 체제 사이의 대립은 차츰 해소될 듯 보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사다트가 친이스라엘 + 친미 +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치며 무슬림들 사이에서 사탄에 견줄만한 이미지를 얻게 된 것이었다. 1981년, 사다트는 결국 열병식 도중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 장교들의 총탄 세례를 맞고 사망하게 된다.
이 사건은 당연하게도 이슬람주의와 아랍 각국 정부 사이의 관계를 냉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사다트의 뒤를 이어 호스니 무바라크(حسني مبارك)가 집권한 이집트에서 (나세르 시절만큼은 아니었지만)이슬람주의는 탄압의 대상이 된다.
1979년 1월, 세속주의를 견지하던 팔라비 왕조 이란에 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전복되고 이슬람 신정 정부가 세워졌다.
같은 해 11월, 이란 혁명에 영향을 받은 이슬람주의 무장 세력이 이슬람 최대 성지인 메카 대모스크를 점거하고 서구화되어 가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를 규탄했다.
한 달 후,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반소 이슬람주의 무장단체인 무자헤딘(مجاهدين) 섬멸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이 소식은 전 세계 무슬림들을 분개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1979년에 발생한 세 사건은 이슬람주의의 비약적인 확산에 큰 영양을 미치며 이슬람 세계, 그리고 아랍 역사의 또 다른 전환점이 된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랍인들에 의해 견인된 제2의 이란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30년가량 굳건히 유지되어 온 아랍 사회주의의 철권통치를 무너뜨리기에는 시기상조였던 것이다.
즉각적인 혁명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이슬람주의자들은 이때부터 아랍 각국에서 여론 장악과 합법적 정치 활동 등을 통해 서서히 체급을 불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30년 후, 이들을 위한 하나의 기회가 찾아오는데, 바로 아랍의 봄이었다.
2010년 12월, 20년 넘게 일인 독재 체제가 유지되던 튀니지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나 체제를 전복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는 독재에 시달리던 수많은 아랍 국가들에 영향을 미쳤으며, 말미암아 아랍권 대규모 민주화운동 아랍의 봄이 시작된다.
아랍의 봄은 독재를 통해 겨우 연명하던 아랍 사회주의 체제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은 사건이었다. 이집트에서 무바라크가 축출되고 무슬림 형제단이 집권하였으며, 리비아에서는 카다피가 분노한 시민군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시리아에서는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다.
그리고 이러한 변혁의 열기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독재에 대한 대항마로 이슬람주의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그 결과 아랍 사회주의 독재 체제가 붕괴된 곳에 이슬람주의 신정권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무바라크가 축출된 이집트에서 무슬림 형제단의 무함마드 무르시(محمد مرسي)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카다피 정권이 무너진 후 리비아 트리폴리에는 이슬람주의 성향의 국민합의정부가 수립되었다. 또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상대로 거병한 시민군의 상당수는 이슬람주의를 기치로 내세웠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떠올렸던 아름다운 미래는, 곧바로 찾아오지 않았다. 이집트의 무르시 정권은 차츰 이슬람 극단주의의 양태를 띠면서 국내외로 많은 비판을 받았고, 1년 후 국방장관 압델 파타 엘 시시(عبد الفتاح السيسي)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다시 독재 체제로 회귀하고 만다. 리비아에서는 이슬람주의 정부와 세속주의 정부 사이의 내전이 발생했으며, 시리아에서도 내전이 계속되는 틈을 타 IS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가 준동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반세기 넘게 지속된 골이 깊은 갈등은, 오늘날 아랍의 평화를 막는 장애물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평화를 열망하는 아랍인들의 의지가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라크, 리비아의 정세가 비교적 안정적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점과, (아직 더 지켜봐야겠지만)올해 12월 마침내 아사드 정권을 무너뜨린 시민군이 다양한 세력을 포용할 것은 선언했다는 점은, 아랍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모든 고통이 종식되고 아랍이 비로소 행복해기를 기원하며 기사를 마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