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님을 위해 부르고, 부르고, 또 부르는 이 노래

재해석된 예술 - <임을 향한 행진곡> / 장한

by 와이파이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반복되는 두 구절 속에는 강한 의지를 담은 당당함과 간절함이 느껴진다. 수많은 영혼과 그 뜻을 잇는 산 자들의 외침이 담긴, 임을 위한 행진곡의 마지막 구절이다. 5.18의 상징을 넘어서 이제는 민주화 운동 그 자체의 상징이 된 이 노래는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발돋움할 때, 언제나 우리와 함께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이미 잊어버릴 수도 있었던 것들을 끝까지 올바르다고 믿고 나아갈 수 있게 해준 이 노래에 대해, 감히 평론해보려고 한다.


대부분의 민중가요는 밝고 힘차다. 설령 단조라 하더라도 빠른 박자감과 단조로운 음계로 가슴 속의 무언가를 일깨우는 듯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항상 무언가를 고취 시키고, 당장이라도 당당하게 부르며 행진할 수 있는 듯한 민중가요들은 수많은 민중에게 미래의 희망을 다짐한다.


하지만, 표면상의 임을 위한 행진곡은 대부분의 민중가요가 가지는 이러한 성격을 거부한다. 우선 단조이고, 행진곡이 아닌 진혼곡의 느낌에 가깝다. 현대의 민중가요에 너무 익숙한 필자는, 처음 접했을 때 군가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권위주의에 대항하는 노래라기에는 너무나 권위주의적인 멜로디였다. 하지만 이런 표면적 특성을 거부하듯, 작곡가는 윗부분이 밝게 불리기를 바랐다. 죽은 자들이 산 자에게 전하는 이야기라는 점을 보면, 죽은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보다, 그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품었던 그 믿음에 대해 당당함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실제로 최근 시위에서 불린 임을 위한 행진곡은 언제나 신나는 박수와 함께였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의 5월 민주항쟁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영령을 달래주는 노래극의 엔딩곡으로 시작되었다. 1982년에 처음 녹음된 것으로, 5.18 민주화운동을 기리기 위한 노래이지, 실제로 불렸던 노래는 아니었다. 그렇다. 이 노래는 처음부터 행진곡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혼곡에 가까웠다. 영혼을 달래고 그리워하는 듯한 멜로디는 이러한 동기를 더욱 크게 느껴지게 해준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최초 녹음본은 작사가 황석영 씨의 자택에서 만들어졌다. 이 녹음본에서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목소리와 꽹과리, 북, 기타로 전혀 조심스럽지 않은, 숭고한, 강력한 의지를 노래하는데, 실제로 들어보면 다른 버전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강한 벅참을 느낄 수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임은 먼저 간 자들, 죽은 자들을 뜻한다. 그들을 위해, 그들이 꿈꾸던 세상을 위해 행진하는 산 자들의 노래가 이 행진곡인 것이다. 작곡가는 이러한 죽은 자들을 위해 노래의 제목에 ‘임’보다 더 고귀하고 숭고한 느낌의 ‘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길 바랐다. 하지만 현재, 이 노래의 정확한 명칭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이는 국립국어원에서 제시한 두음법칙에 의한 변화를 적용한 것으로, 작곡가의 의도가 고려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예술 작품의 경우는 시적 허용이 가능해서 엄밀히 말하면 이 노래는 두 가지의 표기가 모두 가능하다. 실제로 경향신문 등에서는 ‘임’이 아닌 ‘님’의 표기를 정식으로 채택하였다. 필자는 이러한 주장과 같이 현재의 정식 표기에 대해 반대한다. 국어사전에서 ‘임’의 뜻은 사모하는 사람에 그쳐있는 반면, ‘님’은 임의 뜻과 함께 접미사이자 의존명사로서의 존대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전적인 의미를 고려했을 때에도, 문법적 오류를 뛰어넘어 시적 허용으로의 정식 표기가 맞다고 생각한다. 한용운 선생의 「님의 침묵」도 ‘님’이 정식 표기인 것처럼 말이다.


한편 임을 위한 행진곡에는 가사의 원문이라고 볼 수 있는 시가 있는데, 바로 백기완 시인의 「묏비나리」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와 진짜 의미를 볼 수 있지만, 강한 민주화의 의지를 담고 있어 현재까지 극우세력에게 임을 위한 행진곡이 공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 사회에서 중론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극우의 논리이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이게 우리나라 정부의 공식 입장과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속상함은 감출 수 없다. 시의 전문이 상당히 길어 일부만을 발췌하여 쓰자면 다음과 같다.



맨 첫발

딱 한발띠기에 목숨을 걸어라

목숨을 아니 걸면 천하 없는 춤꾼이라고 해도

중심이 안 잡히나니

그 한발띠기에 온몸의 무게를 실어라

아니 그 한발띠기로 언 땅을 들어올리고

또 한발띠기로 맨바닥을 들어올려

저 살인마의 틀거리를 몽창 들어엎어라

(중략)

꽹쇠는 갈라쳐 판을 열고

장고는 몰아쳐 떼를 부르고

징은 후려쳐 길을 내고

북은 쌔려쳐 저 분단의 벽

제국의 불야성, 왕창 쓸어안고 무너져라

무너져 피에 젖은 대지 위엔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릴지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굽이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

(중략)

승리의 세계지

그렇지, 지기는 누가 졌단 말인가

우리 쓰러졌어도 이기고 있는 민중의 아우성 젊은 춤꾼이여

오, 우리굿의 맨마루, 절정 인류 최초의 맘판을 일으키시라

(중략)

저 폐허 위에 너무나 원통해

모두가 발을 구르는 저 폐허위에

희대를 학살자를 몰아치는

몸부림의 극치 아, 신바람 신바람을 일으키시라

이 썩어 문드러진 놈의 세상

하늘과 땅을 맷돌처럼 벅,벅,

네 허리 네 팔뚝으로 역사를 돌리다

마지막 심지까지 꼬꾸라진다 해도

언땅의 어영차 지고 일어서는

대지의 새싹 나네처럼

젊은 춤꾼이여

딱 한발띠기에 일생을 걸어라



일부를 발췌하느라 시의 감상이 온전히 전해지지 않은 것 같아 독자들에게는 죄송한 마음이다. 하지만 임을 위한 행진곡을 아신다면, 이 시의 전문을 꼭 읽어보시기를 추천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는 음악으로, 악기로, 목소리로 느껴졌던 그 강인하면서 처절한 정의의 의지가, 시의 전문에는 언어로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특히 단순히 ‘앞으로 나가자’라는 말만이 있는 게 아니라 ‘앞으로 나가는 길에는 군바리와, 코쟁이와, 늑대들이 있다. 하지만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라고 강하게 외치는 모습, 곧 이 나라를 바꿀 젊은 춤꾼의 춤이 애처롭게, 강하게, 뜨겁게 필자에게 다가왔다. 젊은 날 그 한발띠기에 인생을 걸었던 우리의 님들과, 다시 그 한발띠기에 인생을 걸고 싶은 지금의 춤꾼들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뜨거운 의지로 합치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처럼 단순히 감상을 넘어서 감정을 움직이는 이 시와 노래의 영향은 비단 일반 시민뿐 아니라 많은 예술가에게도 미쳤는데, 조재도 시인은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한 감상을 자신의 시 「님을 위한 행진곡」으로 남겼다.



이 노랠 들으면

한평생 나가자고 손을 잡고 맹세하던

사람들 틈에 나도 섞여 있는 것 같다

세월이 가도

달라진 게 없지만

내일의 꿈을 잃지 말자고

맹세하던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며, 필자는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싶다.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안겨주기 위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을 다 바친 우리의 ‘님’들이, 지금의 우리 세상을 본다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이 꿈꾸어낸 세상이 이뤄진 것을 보고 행복에 겨운 눈물을 흘릴까 아니면 아직도 완벽히 이루어지지 못한 자유와 평등을 향해 나아가라는 승리의 다짐을 부탁할까?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확신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완벽하지 않아서 아직도 많은 사람이 상처를 받는다면, 그리고 상처 입고 쓰러진 사람들의 눈물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여전히 존재한다면, 이미 그 상처로 쓰러진, 그렇지만 이러한 사회를 향해 올바름을 요구하며 숭고한 소천을 이룩한 님들과, 그 상처를 안고 살아있는 자들과, 그 상처를 극복하여 살아가는 자들이 연대하여 이 세상을 바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필자는 굳게 믿는다.




@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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