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래 이야기

재해석된 예술 - <임을 위한 행진곡> / 이지행

by 와이파이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사망하고 대한민국의 대통령 자리는 공석이 되었다. 독재가 가고 새날이 올 것이라 모두가 기대하던 그 시기에 호기롭게 나선 한 사람이 있었으니, 안타깝게도 전두환이다. 10·26 사태의 수사를 맡겠다며 공권력을 슬그머니 쥔 전두환은 결국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 세력과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윗선이었던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체포하고 제5공화국을 연다.


새날이 오는 줄 알았더니만 웬 새 (칼)날이 온 것. 언제 올지도 모르는 택배가 몇십 년 만에야 왔는데, 시켰던 옷이 아닌 벽돌이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민주화는 그랬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 배송된 이 상황을 당시 대학생들은 절대 봐줄 수 없었다.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는 이 시기에 수많은 대학생들은 전두환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10만 명이 서울역 앞에 모여 민주화를 외쳤다. 이 과정에서 인명피해도 일어났다.


인명피해는 물론이고 계속되는 시위가 신군부로 하여금 정치적 빌미가 될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서울역에 모인 대학생들은 서울역 회군(해산)을 결정하게 된다. 때를 놓치지 않고 전두환은 다음날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산하고 전국에 정치 활동 금지령, 휴교령, 언론 보도 검열 강화 등을 내린다. 해산 시 신군부에게 독재의 빌미를 주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모이지 말라, 외치지도 생각하지도 말라 하였지만 유일하게 광주는 모여서 외치고 생각하고, 또 바라던 곳이었다. 시민 모두가 마음을 모아 주먹밥과 먹을거리들을 나누고 함께 싸웠다. 어느 때보다도 혼란스러웠을 때였지만 오히려 광주 시민들은 침착했다.


허나 국민을 지켜야 할 사람들은 곤봉으로 죄 없는 사람들을 내리쳤다. 맞으면 뼈가 으스러지고 팔로 막으면 팔이 부러졌다. 애국가는 그저 집단 발포의 시작을 알리는 노래였다. 철저히 고립되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 알려지지 못한 채 계엄군의 무자비한 학살 속에서 광주의 5월은 흘러갔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잔인한 오월이 지나고 영혼결혼식이 열린다.

신부 이름 박기순. 5·18 이전에 윤상원 열사와 함께 들불 야학을 운영하고 노동운동가의 생애를 살았던 사람, 박기순 씨이다. 윤상원 열사가 죽기 2년 전, 불의의 사고로 운명을 달리하였다.


신랑 이름 윤상원. 5.18 민주화 운동 가장 막바지,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초토화시킨 때 마지막까지 남아 싸운 사람이다. 광주에서 시민군들의 대변인이 되어주고, 당시 광주의 상황을 알리기 위한 투사회보를 발행한 사람이다. 계엄군이 다시 도청으로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투항을 고민하던 시민군들에게 그는 “우리는 오늘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어 줄 것이다.”라고 말하며 끝까지 함께 싸우자는 의지를 다졌다.


이 두 신랑&신부의 영혼결혼식에는 축가대신 특별한 노래가 있다. 앞 기사에서도 말했고 이 기사에서도 말할 것이고, 뒷 기사에서도 말하게 될 그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 1981년, 소설가 황석영, 전남대학교 음악인 김종률과 광주지역 노래패 15명이 1박 2일이라는 매우 짧은 시간 동안 ‘넋두리-빛의 결혼식’이라는 뮤지컬을 만들었고, 이 뮤지컬의 마지막을 장식하며 오월의 넋두리를 기리는 노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곡을 작곡한 김종률 씨는 4~5시간 만에 곡이 쓰여졌다고도 했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에 헌정하며, 동시에 광주의 오월을 함께했던 수많은 이들을 기리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0년 광주의 역사, 아니 어쩌면 우리나라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쓰여질수록 어떤 노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잊혀지고, 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런데 왜, 명멸하는 수많은 곡들 속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어째서 이렇게 오래,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는 걸까?


솔직히 말하면 그다지 신나는 곡도 아니다, 가슴에 울림을 주긴 하지만 감성을 자극하기보다는 심장을 쿵쿵 때리기에 평소에 들을 곡도 아니다,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감추고 싶어하던 사람도 분명히 존재했다. 왜 이 노래는 아직까지도 살아있는 걸까?


정말 가만 보면 이 노래가 살아있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암울한 독재정권 시기에 임을 위한 행진곡은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극악무도한 방식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3S정책(Screen, Sports, Sex)으로 국민들의 눈을 돌리고 멀게 하였다. 광주를 은폐시키고 고립시키는 일은 80년 5월 이후로도 이어졌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기만 해도 소리소문없이 끌려갔다.


허나 민들레 같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 이 노래는 살았다. 밟고, 못살게 하고, 덮어버렸지만, 기억하고, 연대하고, 투쟁하던 사람들은 민들레처럼 자꾸 피어났다. 왜 살았냐 물어본다면, 역사의 순간에는 항상 이 노래가 있었다.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려는 모든 움직임이 있던 자리,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스스로의 몸에 불을 질러 죽은 청년의 뜻이 있던 자리,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다 최루탄을 맞고, 물고문을 받다 죽은 자리, 꼭두각시 대통령을 끌어내린 자리.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행진하는 자리엔 늘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있었다.

1997년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이 국가기념일로 승격된 이후로 참여정부 때까지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에서 해마다 불렸다. 그런데 2009년부터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며 노래제창이 공식 식순에서 제외되기도, 식전행사의 위치에 배치되기도 하며 제창이 폐지되고 합창으로 바뀌기도 한다. 심지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대체할 노래를 제정하기로 한다고도 했다.


어찌 보면 오히려 좋은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만, 아기 때부터 함께해온 아끼던 인형을 버리고 대신 처음 보는 새 인형을 사주겠다는 엄마의 모습을 상상하면 무슨 느낌인지 알 것이다. 곡 자체에 담긴 의미, 정서, 역사를 모두 고려하지 않고 갈아엎겠다는 결정이었다. 5.18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자 누군가에겐 애국가 버금가는 귀중한 노래인데 말이다.


합창이냐 제창이냐. 정의부터 알아보자면 제창은 모두가 부르는 것이고 합창은 합창단이 대표로 부르는 것이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상황에 합창단이 대표로 애국가를 부르는 그림을 상상해보면 음…. 곡에 따라 제창을 해야 할지 합창을 해야 할지에 대한 감이 선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부터 불거진 제창 합창 논쟁은 민주화운동 현장에 함께했던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반대로 극우 및 보수 진영에게는 합창이 달가운 소식이었다.


2017년,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며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다시 제창형식으로 바뀐다. 같은 곡이지만 대하는 태도는 지난 이명박근혜 정권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정치적 이념에 따라 바라보는 시각은 달랐지만 적어도 5.18 민주화 운동 유가족, 광주 시민들에게는 긴 가뭄 끝의 단비 같은 일이었다.


역사는 지금도 쓰여지고 있다. 홍콩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에서도 임을 위한 행진은 이어지고 있다. 민주화, 그 가치 하나를 위해서 흘려야 했던 피는 얼마이고 또 걸려야 했던 시간은 얼마였는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 갔을까? 우린 우리 스스로에게 늘 질문하고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앞서서 나간 이가 있기에 산 자들은 따랐다. 앞서서 나간 이가 있기에 산자는 따라야 한다. 산 자여, 따르라.



@이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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