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데모) 돌아보기 1)1960~1980

문화 돌아보기 / 김재헌

by 와이파이

정치인의 이름이 나오는 경우에는, 처음 1회 소개시 칭호를 함께 붙이지만 이후에는 이름만 말합니다 -> (박정희 전 대통령 -> 박정희)


최근 세계적으로, 두 가지의 시위가 크게 뉴스에 대서특필되고 있다. 아마 모두들 알 내용이지만, 미국에서 이전부터 문제화되고 있던 흑인들에 대한 그릇된 처벌이 결국 참혹한 결과를 불러오게 되었다. 5월 26일 20달러 위조 지폐를 사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출동한 경찰이. 경범죄를 저지른 흑인 조지 플로이드를 과잉 진압해 사망에까지 이르게 된 사건으로, 이후 흑인이나 다른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미국의 전역에서, 그리고 전 세계의 여러 곳에서 조지 플로이드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시위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최근 동아시아권에 가장 뜨거운 곳이라고도 볼 수 있는 홍콩 민주화 시위이다. 역사적으로 홍콩은 19세기 중반 아편전쟁에서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이후, 영국의 홍콩에 대한 보유기간이 만료된 1999년 다시 중국의 소유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2019년 중국에 반대되는 입장을 내는 민주화인사가 홍콩에서 죄를 지어도, 중국에서 처벌받게 되는 홍콩 송환법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이후 10월 있었던 홍콩의 구의원 (우리나라의 지역구 의원과 유사한 체제) 선거에서 민주적이며 중국에 반대하는 여러 당들이 여당으로 올라서며, 중국은 홍콩에 대한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바로 홍콩 국가보안법으로, 국가분열, 국가전복, 테러 활동, 외부 세력의 정치적 개입의 행동이 드러났을 때, 최소 3년부터 최대 무기징역까지의 처벌이 가해질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에 홍콩 시민들은 분노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처벌 문제로 인해 최근에는 거리로 쉽게 나서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나라는 어떠한 시위와, 집회를 거쳐서 촛불 집회의 형태에 다다르게 되었는지 알아보겠다.


1. 부패한 정권과 빈곤했던 국민, 그리고 4.19 혁명

전쟁이 끝난 후 한국에 있던 시민들은, 심하게 빈곤한 상태 속에 놓여 있었다. 그들 속에서 정치적으로 ‘국부’ 의 이미지를 잡고자 노력했던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이라는 점을 악용해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을 진행했다. 개헌의 목적은 당시 대통령의 정식 임기인 4년 연임제 기간이 1956년에 끝나자, 자신의 임기를 연장하기 위해 ‘초기 대통령에 한해서는 중임 제한을 없앤다’ 라는 조건을 헌법에 넣고자 했다. 개헌의 기준은 국회의원 총 인원수 2/3이 동의를 할 때에 이루어지며, 당시 자유당의 의석 수는 총 국회인원수인 203명 중 136명으로, 자유당의 모든 인원이 개헌에 투표한다면 대통령의 임기를 바꿀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변수로 인해, 의원 중 135명만이 이승만 대통령의 중임제 폐지에 대해서 찬성하게 되어 개헌은 취소되는 것처럼 보였다. (계산상 135명은 정족수 ⅔, 즉 66.6667%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서울대 수학과 교수를 데려와 새로운 주장을 했다. 그 주장은 바로 203명의 ⅔는 135.33333이 반복되는 형태인데, 이때 0.3333명을 1명이라고 볼 수 없기에, 인원수를 셀 때에 135 = 135.3333 이 성립된다는 사사오입의 논리로 이승만의 임기를 무제한으로 늘려놓게 되었다. 법률의 개정을 이용해, 이승만은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었으며, 이때 선거에서 30.0%를 기록하며(당시 자유당의 참관인이 대부분 투표함을 관리했기에 실질적인 득표수는 더 많다고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이승만의 라이벌로 떠오르게 된 진보당의 조봉암은, 1959년 그가 속해있는 진보당이 북한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고 사형당하게 된다. 2011년 대법원에서 이에 대한 재심이 열리게 되는데, 무혐의로 밝혀지면서 결국 이승만은 모든 정치적 숙적들을 제거하게 된다.


이후 그가 대통령이 된 지 12년이 된 1960년에 다시 대통령 선거가 열리게 되고, 마침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 또한 선거운동 도중 사망하게 되면서 무난하게 재집권에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의문스러운 점이 한 가지 나타난다. 1956년의 선거에서 낙선을 한 부통령 후보 이기붕이, 갑작스럽게 79.2%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정치깡패를 동원하고, 고무신 선거라 불릴 정도로 유권자들을 매수했으며, 심지어는 선거 전날인 3월 14일 미리 이승만과 이기붕의 부정 표를 넣어두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면서, 부산과 마산에서 먼저 시위가 일어나게 된다.


부산과 마산에서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3.15 마산의거가 일어나는 과정 속에서, 실종자가 발생하게 된다. 그의 이름은 마산상업고등학교 김주열 군으로,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이후 시간이 지난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는 시신 한 구가, 심지어는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로 떠오르게 된다. 역시 유해를 조사해보니, 김주열 군의 시체라는 게 확실했다. 이후 부산과 마산 시민들은 물론, 전국의 학생들, 심지어는 대학교수들까지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며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이후 시간이 지나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했고, 전국에 민주화의 바람이 부는 듯 했다.


2. 불꽃같은 청년, 전태일과 6~70년대의 노동운동

60년대 이후, 한국은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61년 5.16 쿠데타를 통해서 실권을 장악하고, 이후 63년 대통령선거에서 정권까지 장악하며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하게 된다. 당시의 목표의식은 다음과 같다.

[1962∼1966년. 제 1차 경제 개발의 목표는 모든 사회적·경제적인 악순환을 시정하고 자립경제의 달성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는 데 있었다.]

즉, 당시에는 철강이나 금속을 재가공해 생산해낼 수 있는 중공업 기술도, 또한 경제적인 기반도 채 갖춰지지 않아 서비스업도 불가능했기에, 일차적인 목표로는 경공업을 통한 경제적인 발전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현재의 기준으로 따져보면 초.중 고등학생에 불과한 어린 소년, 그리고 소녀들이 착취당했다. 1953년 제정 당시부터 88년까지 이어졌던 당시 근로기준법 42조 1항에 따르면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하고 1일에 8시간 1주일에 48시간을 기준으로 한다. 단 당사자의 합의에 의하여 1주일에 60시간을 한도로 근로할 수 있다.] 라는 법률이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전태일 평전 안의 표현을 빌리자면 12시간을 넘어가는 잔업은 물론, 명시되어 있는 휴일의 권리도 제대로 누리지 못했으며, 심지어는 오랜 기간의 노동으로 인해 폐병에 걸리게 되어도 산업 재해로 인한 보상이 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그는 삶으로 투쟁하는 대신 자신의 불꽃같은 목숨을 바쳐 희생했다. 이때가 그가 23세인 1970년 11월 13일의 일이다. 그의 사망 이후에도, 전태일재단이 세워져 노동인권을 준수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또한 근로기준법이라는 당시 잘 알려지지 못했던 법을, 노동운동의 주된 키워드로 올렸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가 대통령에게 보냈던 편지의 전문을 올리며 이번 장을 마무리하겠다.


[대통령 각하 옥체 안녕하시옵니까? 저는 제품(의류) 계통에 종사하는 재단사입니다. 각하께선 저들의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혁명 후 오늘날까지 저들은 각하께서 이루신 모든 실제를 높이 존경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길이길이 존경할 겁니다. 삼선개헌에 관하여 저들이 알지 못하는 참으로 깊은 희생을 각하께선 마침내 행하심을 머리 숙여 은미 합니다. 끝까지 인내와 현명하신 용기는 또 한번 밝아오는 대한민국의 무거운 십자가를 국민들은 존경과 신뢰로 각하께 드릴 것입니다. 저의 좁은 생각 끝에 이런 사실을 고치기 위하여 보호기관인 노동청과 시청 내에 있는 근로감독관을 찾아가 구두로써 감독을 요구했습니다. 노동청에서 실태조사도 왔었습니다만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1개월에 첫 주와 삼 주 2일을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썬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 버립니다. 일반 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일주 45시간에 비해 15세의 어린 시다공들은 일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또한 평균 20세의 숙련 여공들은 6년 전후의 경력자로써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한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 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1일 10시간 - 12시간으로, 1개월 휴일 2일을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희망합니다.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시다공의 수당 현 70원 내지 100원을 50%이상 인상하십시오.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


3. 잠시 찾아온 서울의 봄, 그리고 광주. (7~80년대의 과도기)

3-1) 절대권력자 박정희의 암살, 그리고 그 뒤에 있던 데모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은 역대급으로 힘든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이전 두 차례의 대선에서는 모두 윤보선 후보와 치열한 경쟁을 펼쳐 두 차례 대통령이 된 그였지만, 이전의 선거와는 다르게 젊은 나이로, 40대의 젊은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 개혁을 해야 한다는 ‘40대 기수론’ 과 호남이라는 지지기반을 품은 김대중 후보에게 추격을 허용하자, 이에 대한 위기의식의 측면에서 유신 헌법이라는, 그의 장기집권을 위해 새롭게 헌법을 고친다. 당시가 1972년의 일이다.


이후 박정희는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유신 헌법을 동원해 국회의원 1/3과 법관을 직접 임명할 수 있으며, 또한 6년마다 오는 선거에서 과반의 동의를 얻을 때 임기에 대한 한정이 없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만약에라도 그를 비판하는 세력이 있다면, 긴급조치라는 제도를 통해서 제압이 가능하였다. 또한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표결 단체를 세워, 국민들이 직접 투표하는 직접 선거를 대신해, 전국에 있는 대의원들이 대신 표결을 하는 간접 투표의 방식을 도입했다. 당연하게도, 다음에 있었던 1978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총 2,581명의 대의원 중 2,577명(99.9%)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는 법을 발전시키기 위한 개헌이라는 제도를 악용한 독재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박정희는 외화를 벌어 모은 돈으로 제철소 사업에 성공하는 등 성공적인 중공업의 발전과, 1977년에는 총 수출 100억불을 달성하는 등 경제의 발전으로 민주화의 요구를 묵살하려 했으나, 민주화의 목소리는 다시 한 번 터져나오게 된다. 1978년 12월에 있었던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집권여당이던 공화당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표로 있던 신민당이 지지율은 앞섰으나, 정작 의석수는 더욱 적다는 점에서 부정 투표에 대한 의혹이 있었고, 이후 다시 민주화운동의 물결이 일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결정적으로 10.26 사태에 도화선이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1979년 8월 가발을 전문적으로 제조하는 업체인 YH 무역이 갑작스러운 폐업을 선고하자, 단순간에 일자리를 잃게 된 170여명의 노동자는 당시 제1야당이던 신민당의 당사에 들어가서 농성을 진행하게 된다. 경찰에서는 농성 진압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21세 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발생했음에도 이를 은폐했으며, 야당은 당연하게도 이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하지만 여당에서는 신민당 측에서 농성 장소를 내주었다는 이유를 빌미로 삼아 당시 신민당의 당대표이던 김영삼을 제적하게 된다. 그러자 당연하게도 김영삼의 주 지지 기반이었던 부산과 경남은 이에 대해 분노하면서, 지금까지 쌓아온 정부여당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민주항쟁을 4.19 혁명 당시의 부산.마산 항쟁과 대비하기 위해서 2차 부.마 항쟁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불만들이 쌓이고 축적되며, 박정희 정권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간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오히려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향해 총을’ 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1979년 10월 26일, 아주 절묘하게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날로부터 정확히 70년이 지난 날에, 영원한 권력을 누릴 것만 같았던 박정희는 사망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 암살 사건을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생각하지만, 그 뒤에는 민중들의 목소리가 있었던 셈이다.


3-2) 전두환과 새로운 군부의 등장, 그리고 1980년 5월의 광주.

1979년 당시 지도자 박정희가 사망하게 되고, 이후 혼란스러운 시기가 찾아온다. 유신 체제는 사실상 박정희만을 위한 체제라고 할 수 있었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군대를 장악한다면 바로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시대라고 보아도 무관했다. 당시 육군 본부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박정희의 사망에 대해서 조사할 수 있다는 이점을 활용해서, 1979년 12월 12일에 마치 박정희가 1961년에 시행했던 쿠데타와 유사한 방식을 통해 권력을 잡게 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민주화운동을 그동안 옥죄어왔던 긴급조치라는 시스템이 풀리게 되자,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는 시기가 찾아오게 되었다. 특히 전국의 대학에서 4월의 대규모 집회가 시작되면서, 5월 초 전두환과 신군부는 북한의 침입에 대한 음모론을 통해 서울과 경기권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당연하게도 학생들은 이렇게 갑작스러운 계엄령 선포에 대해서 분노했고, 이에 맞서서 5월 15일 학생들은 서울역 광장 앞으로 모여서 시위를 진행했다. 이때 시위를 진행한 인물은, 미래통합당 심재철 전 의원,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 김부겸 전 의원,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 많은 현직 정치인들이 참여했다. 이들의 계획은 신군부에게 계엄령의 폐지와, 민주화를 강력하게 어필하는 것이었기에 기존에 교내에서만 이뤄지던 시위를 서울역이라는 개방된 공간에서 진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5월 15일 12시 경, 서울역 앞에는 10만 명 이상의 대학생이 몰리게 된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몰리는 것과 대비되어, 주최 측에서는 확실한 행동을 취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에, 큰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9시가 되어서는 해산을 하게 된다. 그리고 2일 후, 신군부는 전 대학 휴교령과 전국적인 계엄령을 선포함으로서 민주화 운동에 대한 강경진압을 발표했고, 모두들 알듯이 1일 후 광주에서는 권력에 의한 참혹한 학살이 일어났다.


5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서울/부산/대전 등 여러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계엄군이 파견되었다. 이때 신군부는 광주에 있는 조선대학교, 그리고 전남대학교에 주둔을 하며 다시 한번 감시를 이어갔다. 차가운 기류가 흐르던 5월 18일 전남대학교에서는, 경찰이 학교 앞으로 등교하던 학생들을 갑작스럽게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를 만류하던 학생들과 시민들마저도 폭행당하는 일이 발생했으며, 다른 곳에서도 폭력적 진압이 일어나자 광주 시민들은 분노했고, 19일 오후를 기점으로 광주 시내 금남로에는 시위대가 모이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계엄군은 최루탄과 가스를 사용해 시위대를 진입했고, 시위대는 시위가 왜곡되어서 보도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광주MBC 건물에 방화를 하는 등 사태는 점점 극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20일, 계엄군은 광주 내에서 밖으로의 모든 연락망을 차단하고, 광주를 본격적으로 봉쇄시켰다. ‘서울의 봄’ 으로 인한 신군부 세력의 희생양은 결국 광주 지역에 있는 무고한 시민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계엄군은 도심에서 시위를 하는 시민들을 체포하고, 폭행했으며 심지어는 총으로 살인을 저지르기까지 했다. 당연하게도 시위대는 계엄군이 민간인에 대한 학살을 자행하자, 이에 맞서서 화순/나주 지역에 있는 예비군 총기보관소에 있는 무기를 가져와 이들에 맞섰다.


계엄군은 시내에서 철수하고, 시외로 물러나자 광주는 시민군에 의해 잠깐의 평화를 맞게 되었지만, 이후 26일 계엄군은 다시 탱크를 타고 시내 점령을 시도했으며, 27일 새벽 4시를 기점으로는 전남도청에 머무르던 마지막 시민군들은 모두 사망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은 최측근이자 다음 대통령인 노태우와 함께,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광주에서의 사태와 관련해 무기징역을 선고받게 되지만, 이후 특별사면으로 인해서 풀려나게 되었다. 다른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평가를 내리면서도, 특히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면서, 북한에서 내려온 세력과, 종북 세력이 만나 이뤄진 국가 전복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미국 CIA 측에서 공식적으로 광주 사태에 대해 조사한 결론으로는 북한의 개입을 찾지 못했으며, 2007년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밝힌 내용에서도 다음과 같은 문장 하나로 답을 일축시킬 수 있다.

『신군부는 5·18기간 동안 ‘북 공작원 독침사건’을 조작하는 등 시민군을 북한과 연계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신군부는 그 어떤 북한군의 침투는 물론 북한과의 연계의혹을 밝혀내지 못하였다.』

1997년부터 광주의 항쟁은 민주화운동으로 공식적으로 기록되었고 법정 기념일로도 제정되었다. 만일 이 사건에 북한이 개입되었거나, 혹은 국가 전복 활동이었다면 이러한 기념일로의 제정은 불가능할 것이며, 역으로 폭력적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에 대한 옹호가 이어졌을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영화와 함께 트렌드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