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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녀작가 Mar 26. 2024

군기반장의 몰락

딸작가

 2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난 나는 우리 집 군기반장이었다. 중학교 때 아빠가 당진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주말 부부가 된 부모님의 영향이었는지, 아니면 K-장녀의 본능이었는지 나는 엄마의 짐을 덜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동생들이 버릇없이 굴거나 학업에 소홀히 하면 아빠의 빈자리를 대신해 잔소리를 하고 혼을 내었다. 그렇게 나는 군기반장을 자처했다.  

 

 이 방법은 특히 첫째 동생에게 효과가 탁월했다. 4살 아래인 남동생은 성격이 순했다. 평소에도 누나 말이라면 고분고분 잘 따랐다. 물론 가운데 낀 자의 사연과 설움이야 있었겠지만, 군기반장은 그런 것 따윈 봐주지 않았다. 오로지 엄마에게 대들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해주면 그만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조금씩 반항기를 보이는 듯했지만 나의 빈틈없는 따발총 잔소리와 매서운 째려보기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열심히 채찍을 휘둘렀다. 너무 했나 싶은 날에는 진심을 담은 장문의 문자 메시지로 당근을 주는 것도 있지 않았다.


 4살 아래 동생도 이렇게 쉽게 다뤘는데 11살 아래 막내 동생은 껌이라고 생각했다. 그 껌이 내 머리카락에 덕지덕지 붙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말이다. 2000년생인 막내는 전형적인 MZ세대였다. 아니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래퍼를 꿈꾸던 동생은 고등학생 때부터 이미 예술가가 된 듯한 삶을 살았다. 그런 모습이 눈에 거슬릴 때쯤, 나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집에 내려갔다. 그것이 몰락의 서막이었다.  

   

 “집에 온 김에 막내 동생 노래 좀 가르쳐줘.”


 엄마가 말했다. 성악전공자인 나는 귀찮긴 했지만 돈 주고 다른 데서 배우느니 내가 기본적인 걸 알려주면 좋을 것 같았다. 그게 문제였다. 가족끼리는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않는 것이라고 했거늘. 나는 오래전 첫째 동생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다 대판 싸웠던 날은 까맣게 잊은 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야 말았다. 동생은 며칠은 제법 열심히 따라왔다.


 그런데 그날따라 자꾸 답답하게 굴었다. 방안은 더웠고 나는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조금씩 언성이 높아졌다. 그러다 갑자기 동생이 소리쳤다.


 "나 안 해!"

 군기반장의 인내심이 툭하고 끊겼다.     

 "뭐? 안 한다고?"

 "어 안 해, 안 한다고!"

 "이게 어디서 큰소리야!"

 "누나가 무슨 상관인데, 짜증 나게 하지 말라고!"

 "뭐가 어쩌고 어째!"


 보통은 이 정도면 꼬리를 내려야 하는데 막내는 달랐다. 어느새 나보다 훌쩍 큰 키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순간 당황했다.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점점 더 험한 말을 했고 고성이 오가고 싸움은 점점 유치해졌다. 그리고 내가 집을 뛰쳐나갔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약이 올랐던 것 같다. 29살이나 먹었는데 고등학생에게 밀리다니. 씩씩거리며 무작정 아파트를 걸었다. 그리고 벤치에 앉는데 갑자기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완패였다.


 조금 있다 엄마가 나를 찾으러 나왔다. 마음은 이미 들어가고 싶었지만 자존심에 앉아있던 나는 마지못해 집에 들어가는 시늉을 했다. 집에 돌아와 자초지종을 들으니 동생도 속상해서 울다 친구들을 만나러 집을 나갔다고 한다. 피식 웃음이 났다. 집을 뛰쳐나가는 모습이 누가 봐도 우린 남매였다. 그날 밤 동생에게 먼저 사과를 했다. 그리고 우리 집 군기반장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았다. 인정받는 군기반장이 되고 싶었던 거지 꼰대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그런 막내가 얼마 전 입대를 했다. 훌쩍 큰 키가 제법 어른스러워 보였지만 빡빡 깎은 머리가 그날 나에게 대들던 밤톨머리와 너무 비슷해 웃음이 났다. 여전히 나에게 막내 동생은 어디 내놓기 불안하고 마음이 쓰이는 존재이다. 부디 막내추운 겨울 몸 건강히 군대 생활을 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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