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은 미술교습소인 라폴라에 가는 날이다. 수업하고 오자마자 급하게 저녁을 먹고 걸어간다. 처음엔 주변을 살필 여유 없이 보행자 신호를 놓치지 않으려고 바쁘게 걸었다. 일 년이 지난 지금은 숨이 편한 걸음으로 걷는다. 걸어서 오 분 거리에 신호등이 세 개가 있다. 하나는 어떻게 해보겠는데 세 개는 빨리 가겠다는 내 의지를 꺾기에 충분했다. 급하게 먹은 밥 소화될 정도의 가벼운 걸음으로 그림을 배우러 가고 있다.
작년에 우연히 도서관에서 하는 ‘어쩌다 그림책 작가’ 수업을 듣게 되었다. 대기자인 나는 늦게 합류했다. 그림책 글쓰기를 처음 배운 날 가슴은 뛰는데 머리는 하얘졌다. 매일 아이들과 그림책을 읽고 보기에 글 쓰는 게 쉬울 거라고 여겼다. 웬걸, 만만치가 않았다. 그림책의 글은 길지도 짧지도 않으면서 재미있고 주제가 선명해야 한다. 거기에 위트 한 스푼 또는 감동 한 방울 넣는다면 최고의 글이 된다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잘 만든 유명한 책을 보여주는 강사의 밝은 표정과는 달리 나는 점점 빛을 잃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글도 글이지만 똥손인 내가 그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수업을 듣기 전에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과 협업하면 되는 줄 알았다. 혼자서 글과 그림을 다 해야 하는 줄 몰랐다.
수업을 듣고 나니 내가 그릴 수 있는 게 없었다. 집에 와서 종이에 선을 쭉 그어 보았다. 반듯하게 그은 선 하나가 없었다. 사람을 그려 봤다. 유치원생이 그린 것 같다. 그동안 나는 수업 때마다 아이들 기 살리는 역할을 했다. 그리는 활동을 할 때마다 예시로 내가 그림을 그리면 아이들은 웃으면서 좋아했다. 자기들보다 내가 더 못 그렸기 때문이다. 내가 펜을 놓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칠판 앞으로 나와서 더 멋진 그림을 그려놓았다. 그러곤 뿌듯한 표정으로 자리에 가서는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아이들 기 살리던 똥손이 오늘은 내 기를 다 죽기고 말았다.
나는 왼손잡이였다. 학교에서 연필 잡는 것을 배우기 전까지는 왼손으로 모든 걸 했다. 학교 다니면서 젓가락질도 오른손으로 바꿨다. 남들 시선을 생각해서 오른손을 많이 쓰려고 애를 썼다. 오른손으로 한다고 해서 잘하는 것은 아니다. 내 오른손은 남들의 왼손과도 같은 것이다. 힘들고 어설프고 불편한 손이다. 그런 손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니 결과는 불 보듯 훤하다. 악필에 똥손이 되고 말았다. 남들이 보기 전에 빨리 끝내고 싶은 불안한 마음이 오른손에 담겨있다고나 할까. 어른이 된 지금은 오른손과 왼손을 다 사용하는 어설픈 양손잡이가 되어 버렸다.
선이라도 잘 긋고 싶어 배우기 시작한 미술 수업이 생각보다 재밌다. 배우자마자 천재처럼 잘 그리는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신선하다. 아무것도 없던 흰 종이에 선을 긋다 보면 풍경이 그려지고 색을 칠하다 보면 흰 종이는 사라지고 풍경만 살아있는 게 무척 마음에 든다. 글 쓰는 것과는 또 다른 창조의 즐거움을 준다. 색이라는 강한 자극을 어떻게 싫어할 수가 있을까. 색이 주는 창조의 에너지는 마치 직렬방식 같고 글을 쓸 때는 병렬방식 같다고나 할까. 물감을 가지고 노는 게 어릴 적 소꿉놀이 같고 인형 놀이처럼 즐겁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즐거운 놀이 하나쯤은 하고 사는 게 건강에도 좋을 것 같다. 하루의 스트레스가 확 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즐겁게 놀다 보면 언젠가는 그림책 하나쯤은 괜찮게 만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아니, 죽기 전에 한 번쯤은 그림책 작가로 살아보고 싶다. 그 꿈을 위해 오늘도 길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