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영화관에서 아랍여행

아랍영화제 후기

by 방자

재작년에 갔던 정동진 영화제가 문득 그리웠다. 아니, 어쩌면 동해에, 혹은 그저 바다가 보이는 어딘가에 가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중 영화제 일정을 다시 확인해 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아랍 영화제>. 이런 영화제가 있다고? 벌써 14회라니. 낯선 이름에 이끌려 찾아 들어간 홈페이지는 금세 내 흥미를 자극했다. 이집트, 요르단, 튀니지, 레바논, 팔레스타인, 이라크 등, 가본 적 없는 나라들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이 상영된다고 했다. “아랍의 삶 속으로 한 걸음 더”라는 주제도 마음을 끌었다. 작년, 그리스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렀던 UAE에서 아랍 국가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품게 되었던 터라 더 궁금해졌다. 열댓 편의 상영작 중 관심이 가는 네 편을 골랐고, 그중 일정이 맞는 두 편을 선택했다. 짝꿍에게 함께 보자고 했고, 우리는 오랜만에 이화여대를 찾았다.


개막작인 <아르제>는 여성 감독 미라 사입이 만든 레바논 영화였다. 서쪽으로는 지중해, 남쪽으로는 이스라엘, 동쪽과 북쪽으로는 시리아와 접하고 있는, 인구가 한국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 작은 나라. 레바논은 나에게 낯선 곳이다. 2016년, 짝꿍과 함께 한 달간 알제리에 머물렀을 때, 현지 수도원에서 한 레바논 신부님을 만난 적이 있다. 우리가 도움을 받던 프랑스 신부님이 “독특한 분”이라며 소개해준 그분은, 어쩐지 ‘이 분이 정말 신부님이 맞나?’ 싶을 정도로 경박한 말투와 엉뚱한 행동으로 나를 놀라게 했더랬다. 레바논은 이슬람 국가가 아니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멍청한 소리 마라”며 레바논 인구의 1/3은 기독교라고 타박하듯 말했다. 심부름 갔던 길, 혼자 간식을 입 가득 넣고 먹으면서 우리를 데리고 다니던 그 장면이 잊히질 않는다. 그는 스쳐간 사람이지만, 이상하리만치 기억에 또렷하다. 내가 아는 유일한 레바논 사람. 그리고 영화 주인공 아르제는, 그와는 너무도 다른 레바논의 얼굴이었다.


다종교 국가답게,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 다른 종파와 지역, 문화적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피부색, 머리카락, 말투, 옷차림 등 겉모습부터 분위기까지 제각기 달랐다. 마론파, 시아파, 수니파, 드루즈 등 각 종교의 특성과 삶의 방식은 영화의 중요한 배경이자 가벼운 유머의 소재로 등장했다. 실제 레바논에는 공식적으로 인정된 18개의 종교가 공존하며, 이 복잡하고 풍요로운 종교 지형이 문화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아르제는 아들과 함께 도난당한 오토바이를 찾아 베이루트 전역을 누빈다. 이 여정은 단순한 추적이 아니라, 도시의 정치·사회적 단면을 오롯이 드러내는 통로가 된다. 종파 간 갈등, 코로나 이후의 경기 침체, 지역 간 편견과 긴장 등 그녀가 지나치는 경로마다 레바논 사회가 직면한 현실이 차곡차곡 스며 있다. 그럼에도 영화는 결코 무겁게만 흐르지 않는다. 아르제의 생존력과 강인한 기질, 가족을 향한 단단한 애정이 이야기 전체를 따뜻하게 끌어안는다고 느껴졌다.


영화가 끝난 뒤, 각본을 쓴 루아이 크라이쉬와의 시네 토크에서 제작의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제한된 예산과 시간 속에서도 동료들과 함께 고군분투하며 창의력을 발휘했던 과정이 인상 깊었다. 21일간 23개의 로케이션에서 촬영했다는 이야기, 한국인 촬영감독이 함께했다는 뒷이야기까지. 그 모든 이야기가 내겐 트리니다드에서 엎어진 영화 프로젝트를 떠올리게 했다. 언젠가 한국에서 열릴 캐리비안 영화제에 초대될 수도 있었던, 수많은 뒷이야기를 품은 그 영화는 아직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그 아쉬움 사이로, 언젠가는 진짜 한국의 극장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가 따라왔다. 언젠가는!


이튿날 아침, 다시 찾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는 <천국의 옆 마을>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흙길을 달리는 트럭, 그 뒤편에 겨우 올라탄 사람들. 처음엔 요르단 영화인가 싶었는데, 그 마을은 소말리아에 있었다. 내게는 뉴스나 영화 속 가난과 해적의 이미지로 각인된 나라. 문득 1991년 소말리아 내전 당시 한국 외교관들의 탈출을 다룬 영화 <모가디슈>가 떠올랐다. 하지만 <천국의 옆 마을>은 전혀 다른 결을 지닌 영화이다. 시골을 배경으로, 변변한 가전 하나 없이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 아버지와 아들, 이혼 후 돌아온 여동생이 함께 사는 집의 일상. 문명과 자본의 혜택을 당연히 여겨온 내 눈으로는, 그 단출한 이야기에 시선을 머무는 데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서두르지 않았다. 감정을 보채지도, 극적으로 끌어올리려 하지도 않았다. 그 담담한 리듬과 조용한 시선은 결국 나를 그 마을과 그 시간, 그 삶의 결 속으로 데려가 주었다.

솔직히 말해, <아르제>를 보고 난 후엔 베이루트라는 도시에 한 번쯤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 ‘천국의 옆 마을’엔 쉽게 발을 디딜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곳에 가는 일 자체가, 어쩌면 용기를 요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던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 아라웰로가 지은 조용한 미소 앞에서 나는 문득 부끄러워졌다. 아마도 나는, 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온전히 마주할 배짱이 없을 것 같다. 그 감정이 어쩌면 이 영화가 가장 정직하게 건넨 울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지난달 연세대에서 열렸던 환경영화제에 이어, 이번에는 아랍영화제까지 다녀오고 보니, 영화제가 새로운 삶과 관점을 만나는 방식으로서 얼마나 큰 힘을 지니고 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뉴스도 잘 보지 않는 나 같은 사람에게, 굳이 먼 곳까지 가지 않아도 세계를 경험하고 타인의 삶을 상상하게 해주는 창 같달까. 앞으로도 더 다양한 영화를 통해, 다름과 세계를 조금씩 마주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계획대로 일 년에 한 나라씩 새로운 곳을 여행한다 해도, 죽을 때까지 가보지 못한 곳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게 좀 아쉬웠는데 영화가 날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를 통해 가보지 못한 세상의 마음들을, 조용히 짐작해 보며 살 수 있을지도.



아르제 (Arze)

감독 : 미라 사입 (Mira Shaib)

배경 : 베이루트, 레바논

줄거리 : 집에서 시금치 파이를 주문받아 팔며 어럽게 살아가는 싱글맘 아르제. 매상을 올리고자 언니의 팔지를 몰래 저당 잡혀 아들에게 배달용 스쿠터를 사주지만 스쿠터가 도난당하면서 아들과 함께 스쿠터를 찾아 베이루트를 헤매는 여정을 시작한다.

인상적인 장면 : 아르제의 언니가 드레스를 입고 춤추고 아르제가 지켜보는 장면. 아르제와 아들이 스쿠터를 타고 도망치는 장면.


천국의 옆 마을 (The Village Next to Paradise)

감독: 모 하라에 (Mo Harawe)

배경 : 소말리아 변두리 마을

줄거리: 천국 불리는 소말리아의 작은 마을. 이일 저 일을 하며 아들(시갈)을 키우며 살아가는 아빠(마마 가데), 그리고 이혼 후 자신의 일을 시작하기 위해 준비하는 여동생(아라웰로). 사연 있는 한 가족의 삶/일상을 따라가는 서정적 이야기.

인상적인 장면 : 마마가데가 담담하게 자신의 사연을 아라웰로의 약혼자에게 말하는 장면. 아라웰로가 미소 짓는 마지막 장면.


>> 7월 28일부터 8월 3일 사이 온라인에서 보실 수 있어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죽음의 방식이 달라진다면, 삶의 무엇이 달라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