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할까? 무엇을 쓸까?

이야기, 다섯

by 방자

들고 다니던 작은 스케치북의 맨 뒷장을 찢어 일곱 칸씩 네 줄, 스물여덟의 빈칸이 있는 달력을 만들어 벽에 붙였다. 한동안 특별한 이동도, 해야 하는 일도 없는 날들이다.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들로 이 칸들을 채워갈 생각에 벌써 설렌다. 무엇을 할까?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집 앞에 예쁜 바다가 있으니 수영을 제일 먼저 적어 넣었다. 사실 내가 하는 것이 수영보다는 그저 물놀이, 물안경 쓰고 바닷속 예쁜 물고기 구경하기에 가깝지만 무엇인들 어떠하랴. 그리고, 요가를 적었다. 일주일 바짝 할 땐 몸이 고되어도 개운하고 점점 유연 해지는 기분이었는데 다시 뻣뻣해지는 것 같다. 글쓰기. 한국에 돌아가기 전 단편 소설 초고라도 완성하고 가려면 이제 좀 부지런을 떨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틈틈이 도 좀 읽어야겠다. 들고 다니는 책들은 다 한두 번씩은 읽었지만 까짓 껏 또 읽지 뭐. 다들 재밌는 책들이다. 근처 다른 마을 방문도 하고 싶다. 주변에 다양 매력을 가진 마을이 많은 것 같다.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하고 떠나온 나말이 사는 윌리가마에도 한 번은 다시 가서 인사를 전해야지.


어느덧 집이 생긴 지 한주가 되었다. 빈칸의 달력들엔 별, 하트, 세모, 동그라미, 꽃 등 하고 싶던 액티비티를 의미하는 도형들이 조금씩 채워지고 있다. 사실 별거도 아닌데 채우는 재미가 있다. 스리랑카는 날이 무더워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돌아다니기가 부담스러운 편이다. 그래도 가장 활동적일 수 있는 시간이라 집이 생기기 전에는 주로 낮 시간에 움직였는데 이젠 아침 7시쯤 집 앞바다로 수영을 다녀오고, 아침을 먹고, 하루를 시작해 오후 3시 전에는 잘 나가지 앉는다. 낮시간 동안 집에서 할 수 있는 건, 글쓰기, 요가, 책 읽기, 밥 해 먹기, 빨래, 낮잠 자기, 빈둥대기 등이다. 집 앞 담장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식량을 구비하느라 바쁜 다람쥐 구경에도 꽤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 처음엔 이 집에 사는 다람쥐 한 마리가 있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집 주변에 돌 아디니는 다람쥐가 엄청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지금은 매일같이 몇 번씩 보는 그 다람쥐가 한 다람쥐인지 여러 다람쥐인지 혼란스럽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든 여럿이든 내 눈엔 같아 보이고 매일 보니 점점 정이 가는 기분이다.


집 근처에는 식당이나 가게가 없어서 이틀에 한 번씩은 버스나 자전거를 타고 주변 읍내에 가 먹거리를 사 온다. 우리가 지내는 바닷가 마을은 길과 구조가 단순해서 집 밖으로 나가 동쪽으로 가는 버스를 아무거나 잡아타면 푸드시티(프랜차이즈 슈퍼마켓)와 생선, 야채, 과일 등을 파는 각종 좌판, 몇 개의 식당과 버스 터미널이 있는 하바라두와(Habaraduwa)에 갈 수 있고, 서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면 관광객과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레스토랑, 비치 카페 등이 많은 우나와 투나(Unawatuna) 혹은 웬만한 건 다 있는 역사의 도시 고을(Galle. 처음엔 갈레라고 생각했으나 사람들이 다 고을이라고 발음함)에 갈 수 있다. 물론 손쉽게 툭툭을 탈 수도 있지만 우리가 툭툭을 잡으면 의심의 여지없이 관광객 물가가 적용되기 때문에 자제하는 편이다(툭툭은 기본요금 50루피에 킬로당 40루피가 공식 가격이지만, 기사들은 외국인에게는 1~2Km 거리도 일단 300루피부터 내키는 대로 부르고 협상해서 타는 게 흔함). 사실 가격 딱지가 붙어있는 슈퍼의 공산품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상품과 서비스에는 관광객 가격이 따로 있긴 하다(심지어 버스도 공영이 아닌 사설 버스는 외국인에게 돈을 더 받는다). 나는 내가 이해하는 로컬 가격에 두배 정도는 그러려니 하고 지불하는 편이지만, 망고나 코코넛 등 과일, 생선, 야채 등 먹거리나 툭툭이 두배 이상의 가격을 부른다고 생각하면 흥정에는 재주가 없는 편이라 두말없이 돌아선다. 그러다 보니 과일 같은 경우는 슈퍼마켓이 더 싼 경우도 많고, 툭툭보다는 몸이 불편해도 버스나 자전거가 맘이 편하다(하지만 이 모든 이슈들은 동남아 대부분의 국가에서 흔한 것이며, 스리랑카의 대부분의 문제 해결은 인도의 그것에 비해 훨씬 쉽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듣고 스리랑카 여행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 필요할 때는 친절한 집주인 카순에게 대리구매를 부탁하기도 한다. 카순은 성실하고 야망 있는(?) 스리랑카 청년이다. 그는 몰디브 리조트에서 일한 8년의 경력을 살려 2년째 자신의 빌라(우리가 머물고 있는 Anara Villa)를 짓고 있는 중이다. 그는 현재 우리가 머물고 있는 방을 포함해 4개의 방과 작은 앞뒤 마당, 본인이 쉬는 부엌이 달린 작은 방을 가지고 있지만 언젠가 이 건물 옥상에는 2층이 생길 것이고, 더 울창한 정원과 더 멋진 뷰를 가진 옥상이 생길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나는 더 나은 서비스와 더 아름다운 정원을 위해 고민하는 그가 마음에 든다. 이 집에 살기로 결정하기 전, 이틀 동안 세 개의 마을을 돌며 스무 곳 이상의 집을 둘러봤다. 이 집은 시내 접근성은 떨어지지만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냉장고, 따뜻한 물, 와이파이, 부엌 사용 가능, 그리고 가격 면에서 최고점을 받은 집이다. 카순은 우리를 위해 옥상에 비치의자와 자전거 등 여럿의 부가 물품을 마련해주었다. 옥상에 새로 비치의자를 사다 놓던 날, 카순은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본인이 더 설레 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날 거기서 맥주를 마시며 코코넛 나무 사이 언뜻언뜻 보이는 바다로 저무는 석양의 붉게 빛나는 수줍음을 즐겼다.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의 해야 할 일 없는 하루들은 소박하고 소중한 경험들로 쌓여 행복이 되어가고 있다.


내가 쓰고 있는 글의 주인공들도 점차 자신의 캐릭터와 스토리를 찾아가고 있다. 어느덧 나의 주인공 단아가 하나둘 떠나간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인지와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의 삶과 공허한 자신의 작은 집을 인지하고 그곳을 떠나기로 결정하는 첫 번째 장이 마무리되었다. 아마도 다시 보면 세부적 에피소드들을 많이 고치게 되겠지만, 일단 이야기를 이어가야 하므로 내일부터는 또 다른 주인공 민주가 사는 인도를 배경으로 하는 둘째장을 시작하려고 한다. 분량이 너무 길어지면 안 되는 글이라 어떻게 짧은 글에 주인공들의 캐릭터와 상황, 그리고 집에 대한 감상과 느낌들을 잘 적어 넣을 수 있을지가 고민이다. 종종 일상에서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하거나 무언가를 보고 듣거나 멍하니 생각을 하다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 어떤 신과 대사가 생각날 때가 있다. 나는 그러면 잽싸게 그걸 생각나는 대로 컴퓨터 노트에 적어놓는다. 물론 그들 중 다수가 쓰이지 않고 노트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 에피소드가 될지도 모르지만, 그런 에피소드들이 쌓여가는 것은 뭔가 부자가 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경험 수집가라는 아이디를 쓰기 시작한 이십 대 중반에 블로그에 나에게 <부>는 <경험>이라며 나는 내가 인지하는 세상에서 가장 부자가 되고 싶다고 썼던 글이 아련하게 기억났다. 그때는 내가 직접 하는 경험만 나의 부에 축적되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생의 처음으로 나의 삶과 내 에피소드가 아니라 내가 상상하는 타인의 삶에 대해 적고, 그들에게 내게 일어난던 행운보다 더 큰 행운을, 내가 겪은 시련보다 더 큰 시련을 경험하게 하며, 그들의 삶에 적당한 맥락을 만들어주기 위해 고민하는 이 모든 경험 역시 내게 남겨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경험, 그들의 경험이 모두 내 부에 축적되는 더블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랄까? 무엇을 쓸지 고민하는 건 즐겁다. 아직은 내게 초심자의 행운이 함께 하는가 보다.


<2016.12.22. 코코넛 나무들 사이로 석양이 보이는, 집 옥상에서. Tal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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