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대하여

이야기, 일곱

by 방자

어디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국가를 떠나봐야 진정한 애국자가 된다. 20대 초반, 두어 차례 1년 가까이씩 해외를 떠돌 때 그 말을 듣고 공감했었다. 낯선 곳에 홀로 서보니 국가가 제공해주는 안전과 사회기반의 혜택이 눈에 보였고, 국가의 제도하에 국민에게 그리고 외국인인 나에게 제공되는 문화적, 사회적 기반시설의 차이를 경험하며 내가 속한 문화와 제도에 감사함과 아쉬움을 느끼기도 하고 내가 속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더 큰 애정을 가지게 되었던 기억이 난다. 집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집 밖에서, 가족의 울타리 밖에서 여행을 다닐 때 더 자유롭다 느끼지만 자유와 함께 높아진 위험요소들과 외로움으로 인해 가족, 그리고 집의 소중함 역시 더 크게 느낀다. 그래서였을까? 여행 중 베를린에서 인생학교에 갔을 때, 나는 새로 나온 인생학교 책 시리즈 중 한 권을 구매해야지 생각했는데 그때 고른 책이 <How to make a Home>이라는 책이었다. 책 서문에는 집을 어떻게 디자인할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어떻게 집이 없어도 집에 사는 것처럼 살 수 있을까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쓰여 있었으므로 앞으로도 반년 가까이 방랑할 나에게 (그리고 돌아가도 어디에 살지 당장 정해진 집이 없는 우리에게)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집(책에서는 집의 영어 표현인 Home과 House를 구분하여 특별히 Home에 대하여 이야기를 풀어간다)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런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사례 중심으로 풀면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집에 대한 관념의 실체를 밝히는 작업을 주로 한다. 흥미롭게 느꼈던 것을 언급해 보자면, 우리가 집이라고 번역하는 영어의 Home은 단지 살고 있는 건축물에 제한되어 쓰이는 것이 아니라 국가, 지방, 조직, 가족, 고향 등 소속된 곳과 지역적으로 살고 있는 곳, 그리고 근원 혹은 기원을 언급할 때도 자주 쓰인다는 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외래어처럼 자주 쓰는 홈그라운드 경기라던지 홈타운, 홈 컨트리, homesick(향수병) 같은 표현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만 살펴봐도 HOME이 우리가 집이라고 부르는 단어에 비해서는 사용의 범위와 의미가 넓다는 느낌이 든다. 아니 어쩌면 우리도 많은 사람들이 은연중 집이라는 말에 <소속돼 있는, 친근한, 익숙한, 안전한, 믿을만한> 등의 의미를 포함해서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이상적으로나마 집을 그렇게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내 소설이 <두 여행자의 집, 가제>라는 제목을 가지게 된 것도 이 책을 읽고 난 영향이 크다. 책을 읽은 후 집 없이 떠도는 길 위의 나의 삶이 갑자기 정신적으로나마 집에 사는 것과 같아지거나 어디든 내 집처럼 편히 느껴지는 그런 경험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살고 싶은 삶과 집의 지향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게 되었고, 나는 그 이야기를 누군가로 하여금 풀어가게 해보고 싶었다. 물론 글을 잘 쓸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글에 집에 대한 단상과 여행에서 느끼는 집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넣으려 노력 중이다.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이곳 탈페의 Anara Villa에서 살면서 내가 "집에 가자." "집에 뭐 먹을 것 좀 남았나?" "탈페 살아요." 등의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을 보니 어느덧 지금 있는 이곳을 나의 집으로 인식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집주인 카순에게 한 달치 렌트비를 냈기 때문만은 아닐 거란 생각도 든다. 우리는 정말이지 이 곳에 짐을 풀고 천장에 매달린 팬부터 침대 밑까지 방 곳곳의 먼지를 치워내는 청소를 몇 번이나 감행했다. 게다가 매일 청결을 위해 쓸고 닦고, 손빨래를 하는데다 하루 세끼 중 적어도 두 끼 정도는 밥을 해 먹으니 집을 유지하기 위한 일상 활동은 거의 다 하는 셈이다(잠깐 머물다 가는 여행자와 다른 점). 나는 종종 옥상에서 코코넛 나무 사이로 부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보는데, 이때 특별히 자유와 행복을 느끼며 역시 우리 집이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그런 생각을 할때면 매일 이곳에 올라와 책을 읽는 것이 이 집을 최대로 누리는 것이다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매일 올라가 책을 읽지는 않는다. 아마도 내일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매일 보는 카순, 그리고 자주 들리는 카순의 아버지, 여동생 탈리니, 어머니와도 이제 퍽 친근한 사이이다. 나름 눈치껏 서로 챙기고, 배려하고 돕는달까? 양 옆의 세 방에는 계속해서 머무는 사람들이 바뀌는데, 그들은 대부분 연말연시에 친구, 가족과 함께 여행을 하고자 전 세계에서 온 단기 여행자들이다(가끔 더 짧게 머무는 스리랑카 사람들도 있긴 하다). 어떤 사람들과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과는 제대로 한번 마주치지도 못하지만 나는 카순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속속들이 전해 듣고 있는터라 그들 역시 다 내가 아는 사람 같이 느낀다. 길 가다 만나는 동네 툭툭 기사, 가게 아저씨, 밥집 아저씨들도 조금씩 눈에 익어 서로 눈인사라도 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조금씩 자전거를 묶어 놓지 않아도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고, 집에 귀중품을 두고 다녀도 위험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변화. 이런 인지와 상대적 인식 변화가 나로 하여금 이곳이 우리 집이라고 인식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며칠 전 남자 친구의 가방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발견했다. 군대에서 처음 읽었던 거라는 그 책은 너덜너덜해져 앞의 몇 장이 떨어지고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나는 작은 책이었다(그가 이 책을 일 년 동안 가지고 다니고 있단 사실을 몰랐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옥상의 코코넛 그늘 아래서 이 책을 사흘에 걸쳐 읽었는데, 몇 번을 읽었던 책이지만 이 책이 영문판이어서인지 아니면 내가 지금 집에 대한 글을 쓰고 있어서인지 You can’t trust a man if you don’t know his house라는 구절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행복의 비밀을 얻기 위해 현자를 찾아간 사람에게 찻숟갈의 두 방울 기름을 떨어뜨리지 말고, 훌륭한 자신의 집을 구경하고 오라고 (그것이 행복의 비밀이라고) 한 현자의 말 중 한 부분이었다. 책에서는 집을 세상에 비유한 듯 했는데 나는 그것이 그냥 세상이 아니라 그의 세상, 혹은 나의 세상. 즉, 주체자가 있는 인지된 세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이라는 공간은 나의 과거, 그리고 지향하는 미래, 무엇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과 세상을 가장 잘 투영되는 창이 아닐까? 불현 점점 더 사람들을 초대하지 않고, 친구의 집에 놀러 가지 않으며 대부분 (카페, 회사, 학교, 식당 등) 공공 공간에서만 사람들을 만나며 사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우리 시대에 숨겨진 공간인 집은 얼굴에 가면을 쓰고 사는 것이 같다는 현대인의 (남루한 속사정과 화려한 이상을 모두 포함하는) 민낯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타인의 집이 보고 싶어 졌다. 그리고 내가 이게 나라고 보여주기 위해 꾸민 집이 아닌, 나 자체가 자연스럽게 녹아든 나의 집을 꿈꾸고 싶어 졌다.


<Talpe, 집에서 20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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