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여덟
시간이란 무엇일까? 스스로 던진 질문에 나는 내 대답보다 사람들의 대답이 궁금해졌다. 어쩌면 스스로 쉽사리 답이 떠올릴 수 없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 수차례에 걸쳐 인생학교라는 워크샵을 진행한 적이 있는데, 오랜만에 컴퓨터를 뒤져 그때 작성했던 피드백 파일을 열었다. 거기에는
시간은 자원이다. 아깝다. 멈추지 않는다. 즐겁다. 미래다. 새다(날아다님). 시간이다. 경험이다. 쓰기 나름이다. 나다. 빠르다. 어렵다(대체 정체가 뭔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 돈이다. 다르다. 인생의 조각이다.
라고 쓰여 있었다. 이제 와서 누가 어떤 이야기했는지 기억해 낼 수는 없지만, 그 짧은 정의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단어도, 반박하고 싶은 단어도 있다. 하지만 실은 반박할 거리가 없는 그저 시간에 대한, 혹은 정의한 단어에 대한 인식과 삶의 방식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때 각자 머릿속에서 나온 이 하나의 단어로 시간이란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다양한 이야기들을 공유하면서 처음과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경험을 하거나 자신의 관점을 구체화하는 경험도 했으니. 어쩌면 지금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 내가 구하고자 하는 답이 무언가를 고려하면 적절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다시 시간이란 무엇일까?라는 넓고 흐릿한 질문을 조금 더 구체화 해 지난 1년의 시간은 내게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오늘로서 집을 떠나온 지 딱 1년이 되었다. 스물한 살, 스물네 살, 스물일곱 살. 세 차례에 걸쳐 각각 반년 넘게, 일 년 가까이 혼자 장기여행을 했었지만 제법 오랜만이었고, 나는 더 이상 이십 대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혼자가 아니라 남자 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한 터였다. 이상하게도 부모님은 나의 여행 결정에, 내가 어렸을 적 보다 더 걱정을 하시거나 불안을 느끼시는 눈치였다. 그래서인지 내게 굳이 가야겠으면 결혼을 하고 갔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나는 그런 말을 하는 부모님을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그건 아닌데 싶은 생각에, 그저 결혼을 할 시간도 돈도 없는 데다 같이 나갔다고 같이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으니 같이 돌아오면 그때 생각해 보겠다며 일을 그만두자마자 잽싸게 출발해 버렸다.
가끔씩 내게 자신의 로망이 바로 내가 하고 있는 그것이라며 커플 세계여행이 어떠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에는 그런 질문들이 좀 당혹스러웠다. 내가 하는 여행이 커플 세계여행인지 몰랐는데, 타인들에 의해 내 여행의 정체성이 결정된 느낌이었달까? (막상 나와보니 세계 곳곳에 우리처럼 1년씩 여행하는 한국인 커플 여행자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나보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조금 반박하고 싶었는데 (이것은 그저 과거와 비슷하지만 동행이 있는 1년짜리 나의 여행이라고) 시간이 지나 보니 그 말이 틀린 말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분명 함께하는 여행은, 그것도 (남편은 아닐지라도) 남자 친구와 함께하는 여행은 혼자 하는 여행과는 많이 달랐고, 세계 곳곳을 여행하지는 못했지만 다음에 어디갈지 명확히 정하지도 않은 채 1년 동안 세계라는 범위에서 방랑하며 지낸 것은 사실임으로. 그러므로 지난 1년은 내게 가장 크게는 혼자와 둘의 여행이, 일상이, 삶이 어떻게 다른지를 인지하게 해 주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나는 열여덟 살 때부터 인터넷 카페에서 사람들을 만나 여행을 다녔고, 스물한 살 때부터 혼자 장기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늘 여행은 내게 학교 선생님보다, 책 보다 더 큰 배움을 주는 투자 가치가 있는 선택이었다. 나는 부딪치고 넘어져도 혼자 다니는 여행에서는 스스로 일어설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으므로 넘어지면 누가 보던 말던 실컷 엉엉 울고 다시 일어나 배낭을 메곤 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나의 문제 해결 능력이 향상했다고 믿었으며, 사람들의 문제 해결 능력을 길러주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경험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다양한 경험을 주는 여행을 좋아했고, 경험 수집가라는 아이디를 썼다. 나름의 조직생활을 한 5년 동안 여행에서 한 경험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사회에서 생겨나는 다른 경험들과 여럿의 상충되는 경험을 하면서 나는 스스로 생각하던 건강함과 독립심에 대한 감을 잃어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여행을 하게 되면 그것들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기대한 바에 대해서는 반쪽만 찾은 것 같다. 나는 분명 나이 1살을 더 먹었지만 1년 전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더 건강해졌다고 느낀다. 걷기, 요가, 수영, 여유, 독서, 토론, 공상, 새로운 만남 등 여행에 부가적으로 따라온 다양한 요소들의 영향인 것 같다. 하지만 독립심(내가 생각하는 독립심은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이다)이 더 커졌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관계적 역할 때문인지, 원래 내게 그런 성향이 없잖아 있었던 건지, 나는 조금만 아파도 다쳤다고 말하며 호들갑을 떠는 어린 왕자의 장미 노릇을 자처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근데 이게 나에겐 참 큰 배움인 듯도 하다. 혼자 일어날 수도 있지만 일으켜 달라고, 손 내밀 어보는 것. 그가 그대로 가고, 내가 나대로 가도 아무런 문제없지만 발맞춰 함께 가자고 졸라 보는 것. 함께 있되 서로의 시간과 생각을 존중하는 것. 내게는 아직까지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3년 전, 홀로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걸으며 몇 번이나 읽고 공감했던 칼린 지브란의 예언자라는 책에 나오는 많은 구절들을 이번에 다시 생각하고 몸으로 행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원하던 독립심을 되찾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순 없지만 내게 부족했던 스킬인 이해와 배려, 그리고 인정과 함께함을 참 많이 배웠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다.
나는 곧 한국으로 돌아간다. 아니, 우리는 곧 한국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한국에 돌아가서 한동안 틈틈이 지방을 돌며 함께 살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보금자리 찾기. 이게 우리의 첫 번째 미션이다. 그리고 되는대로 양쪽 가족이 함께 하는 자리도 만들어 보기로 했다. 둘 다 결혼식에는 뜻이 없기 때문에 뭔가 거창한 식을 하게 되진 않을 것 같지만, 조촐하게나마 양 가족이 함께 여행하는 것으로 가족 됨을 공식화하고 서로 축하하는 자리를 만들어도 좋겠다고 이야기만 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한국에 가서 그 일이 다음 일이 되었을 때, 다시 이야기하기로 했다. 이것이 내가 지난 일 년 동안 얻게 된 가장 값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미리 모두 끄집어내 상대방에게 보여주고 하나씩 왜 그런지 설명하거나 이해시키려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가 서로 만족스러운 과정을 찾아가며 함께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 함께여도 혼자일 때처럼 자유로우면서도 함께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 것. 그래서 누군가와 함께하는 나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된 것. 물론, 과거에 누군가 내게 그런 관계가 가능하고 그런 결혼생활도 가능하다는 말을 해줬던 것도 같다. 하지만 머리가 클 만큼 큰 나는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기에는 눈에 보이는 게 너무 다르다며 웃어넘겼던 것 같다.
우리가, 내가, 그가 변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으므로 나는 지난 1년의 시간이 내게 선물한 것을 얼마나 오랫동안 감사하고 누릴지는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결혼이라는 단어가 무겁다고 생각하고, 내가 하려는 게 결혼이 아니라 나와 상대방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우리 가족 만들기의 첫 단계라고 굳이 둘러말하고 싶은 마음도 크다(이것은 내 머릿속에 있는 한국의 결혼제도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 삶의 파트너를 찾고 있다고 말한다면, 지금 옆에 있는 그 사람과 평생의 파트너로서 잘 해보고 싶다고 말한다면, 나는 함께 장기간 여행을 해 보라고 권하고 싶기도 하다.
하루 24시간을 거의 같은 공간에서 보내며, 비슷한 경험을 하고, 거의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이자, 연인이자 적이 되어보는 경험. 이것은 매우 의미 있으며 교훈적이다. 개인적으로는 장시간 각자의 속도로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의 시간을 조율하여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고도 생각한다. 집을 떠나온 지 벌써 일 년이 되었다. 과거의 여행들과는 달리 누군가 내게 지난 1년 동안 세계를 돌며 무엇을 보고 배웠냐고 묻는다면 나는 내가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보다는 내가 만난 나와 그에 대해 할 이야기가 훨씬 많다. 그래서 왜 굳이 비싼 돈 들여 나가 돌아다녔냐는 이야기를 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내가 여행을 통해 얻은 아직까지와는 다르고 특별하다 느껴지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2017.1.12. Tal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