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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큰 그릇 Aug 09. 2022

<나는 큰 그릇이 되기로 했다.>


2019년 10월 나는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당시 직장과 학업을 병행했는데,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었다.


나의 출퇴근 시간은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까지였다. 근무시간 내에 일이 끝나면 그마나 다행이었다. 회사에서 학교까지 통근거리가 약 1시간 30분으로 끝나자마자 뛰어가지 않으면 첫 수업의 시작시간인 6시 40분까지 학교에 갈 수 없었다. 나는 야간대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에 세시간의 수업만 겨우 들을 수 있었다. 때문에 매일 회사가 끝나면 학교로 향해야했다. 야근이라도 해야하는 날에는 마지막 시간이 다 되어서야 교수님의 눈치를 보며 까치발로 강의실로 들어섰다.


수업이 끝나면 밤 9시가 훌쩍 넘었다.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었다. 집으로 가는 막차가 9시 45분에 오기 때문에 수업이 조금이라도 놓치면 버스를 탈 수 없었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정류장으로 달려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도착하면 밤 12시. 그제서야 나의 길고 긴 하루가 끝난다.


사실 아무도 내게 회사와 학교를 병행하라고 강요한 적이 없었다. 나름대로 회사에서 인정받고 있었고, 일과시간에는 취미 생활을 하며 하루를 보내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더 하기로 선택한 것은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학교에 들어가고 1년 뒤, 내가 끝까지 잘 해낼 수 있을까 불안감이 생겼다. 수업은 고사하고 매주 과제가 두세개씩은 있었다. 주말은 오롯이 과제를 작성하는데 모두 사용해야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기간이 오면 아침에 한시간 더 일찍 일어나 공부를 하고, 점심시간에도 동기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시험을 준비해야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공부할 시간을 도저히 확보할 수 없었다.


포기할 순 없었다. 도전했기에 이런 괴로움을 겪고 있는 것이고, 도전하지 않았다면 힘들진 않았겠지만 성장하지 못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다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 끝에 내 그릇을 키워야겠다 결심했다. 그릇을 키우면 담고 싶은 것을 모두 담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내가 원하는 것들을 모두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이 되고싶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그릇이 있다. 아주 작은 간장 종지부터, 앞접시, 파스타용 접시나 밥그릇과 국그릇도 있다. 일부 그릇은 크다. 냉면 사발부터 시작해서 양푼까지 있다. 인생이 저 마다 다르듯 그릇 또한 저마다의 쓰임새가 다르다. 만약 밥그릇 정도의 크기만 되어도 만족한다면 그걸로도 좋다. 하지만 욕심을 내어 스스로 담고 싶은 것이 많다면 제 그릇을 키워야 한다. 그릇이 작다면 아무리 많은 물을 담는다 한들 넘치기 마련이다. 결국, 내 그릇의 크기만큼만 담을 수 있다.



그릇의 크기는 후천적인 노력


'살면서 한 번은 논어'라는 책에 따르면 공자는 개인의 품성과 자질에 따라 큰 사람을 '군자'로, 작은 사람은 '소인'으로 나누어 소인을 작은 그릇으로 비유한다. 개인의 노력보다는 태어난 환경과 부모의 자산에 따라 사회 계층을 나누는 일명 '흙수저'와 '금수저'와 상반된다. 공자는 선천적으로 얻어진 특별한 지위보다는 후천적인 노력으로 쌓은 덕성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군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군자불기,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군자는 큰 그릇이 되어서는 안 되며, 아예 ‘그릇’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어찌 보면 그릇이라는 것이 무언가를 담기 위함인데, 그릇이 없다면 모든 것을 담을 수 있을 테니까. 한 곳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걸 담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공자도 군자도 아니다. 그릇이 되지 않고 모든 걸 품으라 한들 그게 그리 쉽지 않다. 직장을 그만두고 정신수양이라도 하러 산에 들어갈 순 없다. 당장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그렇다면 최대한 많은 것을 담기 위해선 역시 그릇을 넓히는 수밖에 없다.


큰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나름의 수행이 필요하다. 내 삶에서 원하는 것을 가득 품기 위해서 자신의 그릇을 키워나가는 수행 말이다. 그렇다면 그 후천적인 노력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즉 ‘내 그릇을 어떻게 키워나갈 것인가?’ 를 고민할 차례다. 그리고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결국 반복적인 ‘연습’ 이었다.


연습을 하지 않으면 실력은 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법칙은 모든 행동과 결과에 적용된다.


수영으로 예를 들어보자. 맨 처음 수영 교실을 가면 숨쉬기부터 시킨다. 레인 구석에서 꼿꼿이 서서 고개를 물속에 넣었다 뺐다 반복하며 '음-파'를 연습한다. 내 뒤로 수영을 하며 지나가는 저 사람들이 부럽다. 나는 대체 언제 저렇게 될 수 있을까 고민하지만 이틀이고 삼일이고 호흡을 연습한다 한들  바로 수영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다음은 벽을 집고 발차기를 하며 또 다시 호흡을 연습한다. 발차기라는 동작이 추가된 것이다.  그나마 좀 덜 지루하다. 뜨지않는 몸을 벽을 붙잡은 손에 의지하며 하염없이 발을 구른다. 반복적인 동작이 지루해지면 괜히 첨벙첨벙 크게 발을 구른다. 강사님의 얼굴에 물이 튀는 걸 느끼면 다시 내 발동작은 약해진다. 그렇게 발차기와 동시에 호흡하는 것이 익숙해지면 그 다음은 연습용 킥보드를 장착한다.


느린 속도지만 킥보드를 양손에 꼭 붙잡고 발차기를 하며 드디어 레인 위를 떠다닌다. 왠지 내가 수영 고수가 된 것만 같다. 비록 내 손은 킥보드를 의지하고 있지만 내 다리는 자유롭다. 나는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런 착각에 빠지며 여럿차례 레인을 왕복한다. 그렇게 호흡과 발차기를 반복해서 연습하고 근육을 단련하면 비로소 킥보드를 떼고 '수영'을 할 수 있게 된다.


기존에 하던 것만 한다면 현상 유지만 될 뿐이다. 내가 만약 호흡만 한다면 나는 수영을 할 줄 아는게 아니라 물 속에서 숨을 참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발차기를 열심히 연습한다 한들 킥보드가 없다면 유리병이 되어 물속에 잠길 것이다.  호흡과 발차기, 킥보드의 모든 도움을 받아 한 단계씩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 마침내 수영을 할 수 있다.


그릇도 키워야 커진다.


그렇다면 내 그릇은 어떨까? 내가 담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담으려고 해야 더 큰그릇이 필요해진다.  내 그릇 크기가 현재로도 만족스럽다면 이대로 있어도 괜찮다. 저마다의 인생은 다르니까. 하지만 더 많은 것을 담고자 한다면 그릇을 키우기 위한 '실행'을 해야한다.


그 실행이라는 것은 본인 스스로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돈을 많이 모으고 싶다면 절약부터 해야한다. 어지간히 절약해서는 돈을 모을 수 없다. 즐겨 사먹던 커피를 끊거나 점심 도시락을 싸서 다니는 것과 같이 지출을 줄이기 위해 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해야한다. 혹은 수입을 늘리는 방법도 있다. 이직을 하거나 진급을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주말아르바이트나 파이프라인을 만들어내야한다. 어떤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그렇기 위해 내 그릇은 커질 수 있다. 이전과는 다른 노력을 했기에 성장하는 것이다.


기존과 같은 방식으로는 변할 수 없다. 우리가 그릇을 키우기 위해선 현재 하던 일에서 추가적인 노력을 해야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결국 현상유지만 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해봐야한다. 우리의 그릇을 키우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할 것인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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