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라고 하기에는 길고, ‘살이’라고 하기에는 짧은 기간 동안 제주로 여행을 다녀왔다. 남편이 여행을 좋아해서 결혼 후 여행을 참 많이 다녔지만, 이번 여행은 몇 가지 점에서 아주 특별했다. 지금까지의 여행이 남편 주도로 이루어졌다면(물론, 정말 매번 좋았다!), 이번 여행은 우리 모두가 "함께" 기획했다. 온 가족이 주말마다 거실에 모여 앉아 지도를 짚어가며 일정과 동선을 짰다. 거실 한 편에 놓인 커다란 화이트보드에 제주의 지도가 그려지고 제주의 북서, 남서, 남동, 북동 순으로 작은 점들이 찍혔다. 그 위로 빼곡한 글씨들. 아이들은 점에서 점으로 이동시간을 가늠해보기도 하고, 일기 예보를 살피며 Plan A와 Plan B를 어떻게 할 건지 논의했다. 재잘재잘, 서로가 고른 방문지에 대한 의견까지 더해 여행이 시작되기 한참 전부터 집안은 여행 이야기로 시끌시끌했다. 이번 여행은 남편이 직장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도 특별했다. 남편은 휴무일이나 휴일에도 전화로 상담을 받고, 정해진 시간에 업무 보고를 받았다. 전화가 걸려오면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고 숙연해졌다. 옆에 있는 나도 영향을 받는데 남편은 어땠을까? 그런 그에게 진짜 ‘쉼’이 허락된 시간이었다.
하지만 어디에 가든 우리는 우리를 지니고 간다.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기대와 의욕에 미치지 못하는 체력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지기도 했다. 빨리빨리 계획대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서두르는 남편과 느긋하게 누리고 싶어 하는 나 사이의 충돌도 벌어졌다. 하지만 기대만큼 좋았고, 기대보다 훨씬 충만하게 행복했다. 첫 며칠은 모두의 머릿속에 들어온 지도를 펼쳤다 접었다 하며 계획한 곳들을 바쁘게 돌아봤다. 한 곳씩 방문할 때마다 그곳을 추천한 사람에게 얼마나 재밌었는지 각자의 감상을 나누며 잘 골랐다고 칭찬을 했다. 하지만 여행의 중반부부터는 렌터카도 반납하고 작은 바닷가 마을에 머물렀다. 매일 같이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 누구도 빼지 않고 풍덩, 바다의 품에 안겨 파도에 휩쓸렸다.
나는 여행 중에 많이 걸었다. 이른 새벽, 여행지의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고 싶어 혼자 산책길에 올랐다. 원체 길눈이 어둡지만 기꺼이 길을 잃을 각오를 하고 마음이 향하는 대로 발길을 옮겼다. 늦여름의 새벽 햇살은 다정했고, 제주의 꽃과 풀, 낮은 돌담과 길고양이들 또한 상냥했다. 몇 시간을 헤매듯 걷다가 막 문을 연 빵가게에서 갓 구운 식빵을 사서 숙소로 돌아오곤 했다.
여행에서의 그 경험이 좋아 오늘 나는 학교에 가는 아이를 따라나서 집 주변을 걸었다. 내가 발 딛고 선 곳에서 여행자처럼 산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물음이 떠올랐다. 많은 답이 있겠지만, 나에게는 방문을 열고, 현관을 열고, 집을 나서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며 만나는 것, 기쁜 마음으로 아침 거리를 장만해 오는 것, 젖은 빨래의 물기를 탁탁 털어내고 햇볕 아래 널어두는 것, 그리고 풍덩, 세상 속에 몸을 힘껏 던지는 것. 그렇게 지내고 싶다. 다시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당분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