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기억 못 하는 게 다행이야.
이사로 동네도, 어린이집도 바뀐 그해 봄.
우리 딸이 다섯 살이 되던 해였고,
내 생일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새로운 어린이집에 적응한 지 이제 겨우 2주째.
담임 선생님은 아이가 낮잠을 잘 안 잔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섯 살이면 그럴 수도 있지 싶었다.
원장도 "그 나이쯤 되면 안 자려는 아이들도 있어요~ 안 자는 아이들은 놀이공간에서 놀아요~"
라며 안심시켰으니까.
그래서 나는, 아이가 보내는 작은 저항의 신호들을
그저 '적응 중'이라 여겼다.
요 며칠, 딸아이는 어린이집 가기 싫어 문 앞에서
다리를 베베 꼬거나 도망을 다녔다.
차라리 “가기 싫어”, “어린이집 안 갈래”라고
정확히 말해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매일 스무고개 하듯 아이의 말과 몸짓을 조합해 그녀의 마음을 읽으려 애썼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오랜만에 친구와 약속이 있던 날.
도망 다니는 아이의 두 손을 잡고 어린이집 앞에 섰다.
"엄마 눈 봐~ 엄마 입 봐~ 엄마가 오늘은 좀 더 일찍
데리러 올게.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놀고 있어.
알겠지?"
서둘러 약속 장소로 향했다.
어릴 적부터 친했던,
생일도 이틀 차이 나는 친구에게 괜히 투덜댔다.
"오늘따라 등원을 더 안 하려고 해서~
꼭 약속 있는 날은 알고 더 그러는 것 같아~"
그렇게 후다닥 밥 먹고 커피까지 마신 뒤,
마음 한편이 불편해져 아이를 조금 일찍 데리러
가려던 참에 시어머니께 전화가 왔다.
"일찍 퇴근했는데 손녀 보고 싶다"며
함께 어린이집에 가자 하셨다.
새로운 어린이집도 보여드릴 겸 동행했다.
담임이 아이를 데리고 나와 퉁명스레 말했다.
"○○이가 오늘도 낮잠 안 자려고 하고,
낮잠 시간에 말을 안 듣네요."
그 말에 시어머니가 나섰다.
"낮잠 시간에 안 자면 안 되나요?"
나는 어쩔 줄 몰라 우물쭈물하는데 원장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세요~?"
시어머니는 단호하게 말했다.
"들어온 지 일주일 막 넘긴 애를 낮잠 안 잔다고 면박 주는 건가요? 말을 안 듣는다는데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안 듣는다는 건지 알고 싶네요."
나도 그제야 궁금해졌다.
아이는 표현이 서툴렀을 뿐인데…
놀이방에서 놀 수 있다던 그 말은 어디로 간 걸까?
원장은 “아이 생활이 궁금하실 수 있으니 원장실에서 보여드릴게요” 하며 우리를 데려갔다.
담임도 따라 들어왔다.
아직 하원 안 한 아이들이 반에 여럿 있는데
굳이 뭘 따라 들어온담? 싶었다.
낮잠 시간대 CCTV를 보여주겠다는 말에
별생각 없이 화면을 봤는데—
그 순간, 내 안의 시간이 멈췄다.
우리 아이.
새로운 어린이집에 간다고 새로 산 낮잠이불 뽀송하게 빨아 보냈는데..
아이가 고른 토끼 이불에 예쁘게 누워 있어야 할
내 아기를 담임은 매섭게 잡아끌고,
밀치고, 때리고 있었다.
가감 없이 정말 밀치고 때리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입이 얼어붙었다.
그 후로의 기억은 흐릿하다.
시어머니의 고성과, 당황한 원장과 담임의 모습.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경찰에 신고했다.
"우리 아이가 아동학대를 당했습니다.
지금 바로 와주세요..."
태어나 처음 112에 전화했고, 처음 경찰서를 갔다.
내가 너무 싫었다.
가기 싫다는 신호를 온몸으로 보내던 아이를,
나는 등 떠밀어 보냈다.
내가 그 악마 같은 곳에 우리 아이를 밀어 넣었다는
죄책감.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정신과 문을 두드렸다.
밤마다 잠을 잘 수 없었다.
그저 멍하게 앉아 있으면 눈물만 줄줄 흘렀다.
나를 다독이던 남편.
힘들어하던 나를 데려다준다는 핑계로
같이 간 정신과.
“남편분도 잠깐 상담 좀 할게요~“
하는 의사의 말에 남편이 들어간 진료실 밖에서
멍하니 앉아 기다리던 나는
어디서 들리는 서글픈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렇다.
나를 다독이느라 자기감정은 챙기지도 못한 채
남편은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의사는 말했다.
이제야 보였다.
밤마다 악몽을 꾸며 소리치던 아이.
담임의 퉁명스러운 눈빛과 말투.
온몸으로 등원을 거부하던 딸.
CCTV는 경찰이 저녁에 수거해 갔고, 그 사이 일부가 삭제되었다고 했다.
국과수에 보내 복구한다고 했다.
이게 진짜 현실이 맞나.
그저 TV 뉴스에서나 보던 일들이 내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겨우겨우 숨만 쉬며 견디는 나에게도,
헤쳐 나가야 할 일은 쏟아졌다.
남편과 나는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듯 여행을 떠났다.
이 모든 일이, 이사 온 지 한 달도 안 되어 벌어졌고,
등원한 지 겨우 2주 된 시점이었다.
물 좋아하는 우리 아이를 위해 나트랑 풀빌라에서
몇 주를 지냈다.
그 시간 동안, 아이와 24시간 함께 지내며 오직
아이에게만 집중했다.
그 때문일까, 충격 때문일까.
우리 딸은 그때부터 자기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 마”, “아니야”, “내 거”, “엄마 이거~”
두 돌 아기들이 할 법한 말이지만,
그 작은 말들이 나에겐 기적 같았다.
이사 오자마자 벌어진 악몽 같은 일.
정도 붙이기 전에 우리는 다시 이사를 했다.
기관에 대한 불신이 생긴 나는,
소수 인원에 케어가 좋은 곳을 샅샅이 찾았다.
사람 죽으란 법은 없었다.
그 일을 겪고 우리 가족은 더 단단해졌고,
서로를 더 이해하고 표현하게 되었다.
새 기관에선 아이도 더 잘 적응했고,
언어치료와 놀이치료에서도 눈에 띄는 성과를 보였다.
두 돌 무렵 시작한 언어치료는 무려
일곱 살이 되어서야 마침표를 찍었다.
지금은 수다쟁이 딸이다.
우리 가족들은 얘가 언제 말을 못했냐며 다들 웃는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까지. 지금은 네 개 국어를 한다.
그때도 믿었다.
우리 아이의 ‘언어그릇‘이 좀 크다고.
그 그릇이 다 채워지면 말할 거라고.
그리고 나는 그 믿음을 놓지 않았다.
아이는 내가 믿는 만큼 큰다.
나는 내 아이를 보물이라 부른다.
예쁘게 반짝이는 보물이 되도록
내 평생 사랑으로 다듬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