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과거와 현실을 죽여야 한다
넓은 들판 사이로 작게 보이는 군용차량들이 마치 적진으로 침투하듯 치밀하고 은밀하게 달려간다. 숏의 변화 속에서 점점 프레임을 채워가는 군용차량들은 도로 위에 전시된 새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줄지어 달려나간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한 곳은 적진이 아닌 대저택이다.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작전을 수행하듯 대저택에 도착한 군용차량과 달리, 스펜서가 타고 있는 크림색 포르쉐 911은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부유한다. 그것은 정착을 거부하는 몸짓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녀는 진짜 길을 잃은 것이다. 길가의 식당에 들러 평범한 사람들이 가볍게 식사와 커피를 즐기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가 그들에게 “Where am I?”라고 묻는 장면은 그 사실을 명확히 드러낸다.
다시 차를 몰고 헤매던 스펜서는 우연히 왕실의 요리를 책임지는 대런을 만나고, 그 순간 본인이 지금껏 맴돌던 곳이 바로 자신의 본가 주변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는 대런의 말에 본가에 들어가지 못한 채 허수아비에 걸려 있던 아버지의 작업복만 챙기고 돌아서야 한다. 이어지는 숏은 방황하던 포르쉐가 버드아이즈 뷰 시점 속에 갇히듯 출구 없는 대저택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비춘다. 이 영화의 오프닝은 극 전반을 지배하는 불안과 갈등의 상관관계를 압축해 드러낸다.
군인들이 들고 들어온 상자 속에는 무기가 아닌 식재료가 담겨 있고, 왕실의 요리사들은 군 지휘관 같은 헤드 셰프의 명령 아래 크리스마스 음식을 준비한다. 이는 이후 스펜서가 음식을 끝내 삼키지 못하고 화장실에서 토해내는 장면과 연결된다. 단순히 심리적 요인이 아니라, 군주제와 전통이라는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빚어진 음식에 대한 신체적 거부 반응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한 식당에서 민중 속에 섞여 “Where am I?”라 묻던 장면은 영화의 전체 주제를 함축한다. 본가 가까이 있으면서도 길을 헤매는 스펜서의 모습은 끝내 안식처에 닿지 못하는 그녀의 상황을 드러내며, 대저택으로 향하는 포르쉐의 버드아이즈 뷰 숏은 스펜서가 굴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왕실과 스펜서 본가 사이의 물리적 거리다. 스펜서는 고작 500m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스펜서 가’에 닿으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본가는 집사 그레고리 소령과 왕실의 통제 아래 봉쇄되며, 파파라치를 핑계로 그녀 방의 창문 커튼은 모두 꿰매져 닫힌다. 결국 그녀가 본가에 도달하는 것은 그레고리 소령이 침묵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영화 속에서 ‘스펜서 가’는 과거, ‘왕실’은 현재로 기능한다. 두 공간은 불과 몇 백 미터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배치되며 스펜서를 압박한다. 일반적으로 전통은 과거에 속한다고 여겨지지만, 스펜서에게 전통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옭아매는 폭력적 현실이다.
이 짧은 거리의 근접성은 시간적 굴레와 맞물린다. “이번 크리스마스만 버티면 돼”라는 그녀의 대사처럼, 크리스마스이브부터 박싱데이까지의 제한된 시간은 스펜서를 옥죄며 불안을 증폭시킨다. 결국 과거와 현재의 물리적 거리감은 심리적 거리감과 겹쳐져, 어느 곳에도 닿지 못하는 스펜서의 아이러니한 처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스펜서는 점차 대저택에서 유령이 되어 간다. 그녀가 진주 목걸이를 터트려 수프 속 진주알을 씹어 삼키거나, 흰 드레스를 입고 꿰매진 커튼을 뜯다 팔을 자해하는 행위는 곧바로 사라져 버린다. 진주는 다시 목에 걸려 있고, 팔의 상처는 온데간데없다. 그녀가 저지른 행위가 반복적으로 무효화되면서 스펜서는 점점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유령의 존재로 변해간다.
광각렌즈가 왜곡해 보여주는 대저택, 그녀 곁을 따라다니는 심령 같은 카메라는 스펜서의 내적 혼란과 부유하는 감각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이때 등장하는 유령 ‘앤 불린’은 과거의 화신이다. 반투명한 육체와 16세기의 옷차림으로 나타나는 그녀는 말없이 대저택을 거닐며 스펜서에게 무언의 압박을 준다. 그레고리 소령이 앤 불린의 책을 전해준 것은 경고였다. 과거와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스펜서에게 주어진 선택은 두 가지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왕실의 일원이 될 것인가, 아니면 앤 불린처럼 과거 속 유령으로 머무를 것인가.
앤 불린은 단순히 스펜서의 기구한 삶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다. 그녀는 과거와 현재를 모두 부정하고 미래를 열망하는 스펜서의 내적 욕망을 상징한다. 영화가 스펜서와 앤 불린의 비극적 삶의 공통점만 강조했다면 평범한 전기 영화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스펜서가 과거의 회귀를 택하려는 순간, 앤 불린은 처음으로 입을 열며 그 선택을 막아선다. 앤 불린은 과거의 망령이면서도 동시에 미래로 향하게 하는 원동력인 셈이다. 스펜서는 이 과거의 형상을 죽임으로써 비로소 미래를 향할 수 있게 되고, 그 이후로 앤 불린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속 스펜서의 대부분의 장면은 재즈 음악과 함께한다. 악보를 따르지 않는 즉흥연주의 자유로움은 억압된 스펜서의 심리 상태와 대비되며 오묘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그녀 내면의 자유에 대한 갈망과 현실의 억압이 만들어내는 아이러니를 사운드트랙으로 표현해낸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스펜서가 두 아들과 함께 차 안에서 대중음악을 신나게 듣는 장면은 해방의 순간으로 그려진다. 앞서 매기와의 대화에서 했던 “I love Les Mis, I love Phantom of the Opera, I love fast food.”라는 대사가 겹쳐지며, 그녀가 원했던 삶이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그것은 두 아이와 함께 소박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 바로 그것이 스펜서가 선택한 미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