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커.

by Ch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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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커-다른 사람의 의뢰를 받고 상행위의 대리 또는 매개를 하여 이에 대한 수수료를 받는 상인. 중매인, 판매 대리인 등이라는 뜻, 즉 브로커가 존재하는 곳은 자본주의의 기본 시장 체계가 채 범위를 미치지 못하여 제작동을 못하는 곳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브로커>는 교회의 베이비박스에 있는 아이를 몰래 데려다가 좋게 말하면 입양, 직설적으로 말하면 인신매매라는 방식으로 돈을 버는 두 주인공 상현과 동수가 다시 아이를 찾으러 온 아이의 엄마 소영과 마주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영화의 오프닝,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 소영은 교회의 베이비박스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베이비박스 문 앞 바닥에 아이를 두고 온다.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형사 수진이 바닥에 놓여진 아이가 걱정되었는지 아이를 베이비박스 안에 넣어두고 돌아온다. 사실 수진이라는 인물은 국가 시스템 하에서 움직이는 경찰로서 이 영화가 이야기 하는 수정자본주의식 복지의 허상을 내포하며 관료주의 사회의 중심인 직업을 가지고 있다. 영화는 수진의 대사를 통해서 이따금씩 노골적으로 수진의 직업윤리를 표출한다.(그러나 경찰이라고 똑같이 묘사하는 것은 아니다, 차에 트렁크가 열려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친근한 부류의 경찰도 있다.) 그러나 오프닝에서의 수진의 이 행동은 수진이 가지고 있는 직업윤리에 해당되지 않을 뿐더러 영화 상의 수진이라는 인물이 할만한 행동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에 의문을 가진 이형사는 수진에게 왜 아이를 베이비박스에 넣었냐고 물어보고 수진은 “아이가 죽을 것 같아서”라고 답한다. 영화는 국가 시스템의 유지를 최우선으로 할 것만 같은 수진이라는 캐릭터가 그 무거운 겉옷을 잠시 벗어둠으로써 영화가 시작되고 새로운 가족의 형태가 탄생하는 것이다.


브로커 상헌과 동수 그리고 소영은 국가 시스템의 사각지대에서 아슬아슬한 동행을 이어가며 탈가족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사회 속 새로운 가족형태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수 가족의 형태는 자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자본주의와 국가 시스템의 허점으로 인해 탄생된다는 점에서 기인하는데 영화의 오프닝 수진이 아이들 안아드는 장면을 교회라는 장소에서 아기 예수의 재림처럼 표현해낸다. 영화는 극의 후반을 달려가면서 이 새로운 가족의 형태가 계속 지속될 수 있을 것인지의 문제에 봉착한다. 영화의 엔딩에서 소영이 출소 후 합법적인 노동을 하며, 수진, 동수와 새로운 가족형태에 대한 논의를 하게 될 것을 예고하지만, 이는 영화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단순히 밝은 엔딩은 아닐 것이다. 가족의 유지를 위해 상현은 동수 보고 때리지 말라고 했던 아는 집 아들을 죽였고, 우성은 소영의 부탁으로 인해 수진에 의해서 길러지듯이 신자본주의사회에서의 국가 시스템은 여전히 그들에게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고레에다 감독은 지속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가족의 존재에 대해서 탐구해왔다. 그의 가족영화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는데 근원적인 가족 이야기(걸어도 걸어도, 바다마을 다이어리)와 국가 시스템 속 사각지대에 놓인 가족의 이야기(아무도 모른다, 어느 가족)이다. 브로커는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으며, 전작들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브로커라는 상현과 동수가 가지게 되는 윤리적 딜레마가 노골적으로 표현되며, 수진과 이형사, 그리고 소영의 대사들까지 이전의 영화들에 비해 더욱더 직접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는 이전의 <어느 가족>등 이전 작품들에서 보인 작위적이지 않은 캐릭터들의 객관적 체험을 통한 소박하지만 효과적인 전달과는 반대되는 방법으로 매력을 상쇄시킨다. 고레에다 감독은 이번에도 관객들에게 묻는다. 가족이라는 개념은 사회에서 무조건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 그렇다면 미래에는 어떠한 형태로, 어떠한 방식으로, 어떠한 구성원으로 이어나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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