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나날.

무(無)와 간(間)의 연속성

by Chet


1. 영화의 첫 장면,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준비하는 각본가 ‘이’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는 마치 눈앞의 대상을 응시하며 데셍을 준비하는 화가처럼 연필을 들어 올리지만, 그가 흰 종이 위에 그려내는 것은 회화가 아니라 텍스트다.


2. 영화의 1부라 할 수 있는 여름 파트에서 ‘이’가 창조해낸 세계는, 그가 벗어나고자 하는 말로 가득한 세계이자 영화와 이미지에 대한 욕망이 조용하게 꿈틀대고 있는 세계다. 영화 속의 영화에서 각자의 칸과 가림막 뒤에 존재하던 인물들은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거나 벗어나기도 하지만, 결국 넘실거리는 물속에서조차 서로를 완전히 분해하거나 융화하지 못한다. 이는 즉 칸과 칸(쇼트와 쇼트) 사이에 존재하는 불가피한 단절성을 드러내는 장면처럼 보인다.


3. 영화를 관람한 우오누마 교수가 이 작품을 두고 ‘관능적이고 섹시하다’고 말하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감각이 아니라, 이미지에 대한 욕망과 인물들 사이의 거리, 그리고 그 거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침범과 이탈의 긴장에 대한 표현이다. 다시 말해 이는 영화가 지닌 단절성—그리고 그 단절성을 기본으로 하는 영화 매체 자체에 대한 발언이기도 하다.


4. 우오누마 교수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그의 유품인 수많은 필름카메라 중 하나를 물려받은 ‘이’가 처음으로 촬영하는 대상은 어두운 밤을 가르며 달리는 전철이다. 어두운 밤을 뚫는 전철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반짝이는 칸들이 빠르게 흘러가는 모습은 마치 칸과 칸(쇼트와 쇼트) 사이가 영사기를 빠르게 통과하는 모습과 같을 것이다.


5. 이 영화에서 통과라는 요소는 중요하게 다가온다. 두개의 터널이 있고 각자의 터널에서는 각자의 이미지(쇼트)가 충돌되지 않은 채 투과 된다.


6. 말이 멸시되고 이미지(쇼트)가 우선시 되는 곳을 찾아서 떠난 여행을 위해 ‘이’는 철저히 텍스트를 외면한다. 영화 상으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으며, 그림으로 된 지도를 이용하는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방식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기에 ‘이’에게는 당연하게도 말과 텍스트가 가득한 곳(도심)에서 머무를 자격이 부여되지 않는 것이다.


7. 2부에서는 1부와는 다르게 칸과 칸(쇼트와 쇼트)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인기척이 없는 작은 여관에 사람이 없는 지 확인하기 위해 ‘이’는 칸이 나눠진 창틀로 잡안을 몰래 쳐다본다든지, 쇼트에 대한 은유는 1부에 이어 지속적으로, 조금 더 노골적인 방식으로 드러낸다.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기에 조금 더 흥미롭게 다가온다.


8. 글을 쓰던 ‘이’가 칸이 나뉜 창틀을 통해 흰 도화지 같은 눈 속에서 노동하는 ‘벤조’를 바라보는 장면이 먼저 제시되고, 이후 창틀과 유사한 구조물의 포커스를 흐려 칸과 칸의 경계가 옅어진 프레임 안에서 ‘이’와 ‘벤조’가 함께 존재하는 장면이 추후 이어진다. 비록 1부와 마찬가지로 칸과 칸 사이의 침범은 발생하지만, 단순히 단절로서 끝맺음 하는 것이 아닌 2부에서는 그 침범이 오히려 ‘이’와 ‘벤조’의 융화 가능성을 드러내며, 영화는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관계 맺음을 제시한다.


9. 결국 이 영화는 이미지에 연속성에 대한 이야기 같기도 하며 간間에 대한 이야기 같기도 하다. 일본의 건축가 안도 타다오는 건축을 할 때 공간을 어떻게 채울지 보다는 어떻게 비워둘지를 더 중요시 한다고 한다. <여행과 나날> 역시 마찬가지다. 무(無) 혹은 간(間)이 있기에 이미지가 성립하며, 이미지가 있기에 다시 무(無)와 간(間)이 감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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