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욕망하는 방식
영화는 사진에 담길 준비를 하고 있는 양의 가족으로부터 시작한다. 가족들은 양을 프레임 안으로 불러들이려고 계속해서 소리치지만, 양은 오랜 시간을 필름 카메라의 35mm 프레임 속에 담긴 가족을 바라본다. 그렇다면 과연 첫 번째 쇼트에서 기억매체인 사진에 담기려고 하는 양의 가족을 담는 것은 양의 시선인가, 필름 카메라의 프레임인가? 다음 쇼트에서 양이 카메라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크게 드는 의문은 왜 필름 카메라인가?였다. 영화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이미 양이라는 휴머노이드가 시판되는 상황에서 2000년대가 되면서 디지털로 작동되는 카메라들에게 자리를 내준 필름 카메라가 미래에서 사용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필름 카메라는 사실 영화의 역사로 통한다. 사진과 영화라는 예술매체가 공통된 뿌리로 이야기하는 것은 사진기와 필름의 발명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 쇼트에서 기록 매체의 처음과 끝이 공존한다. 필름 카메라와 양은 그렇게 혼효되며, 제이크는 계속해서 양을 그 위치에서 떼어내려고 하며 자신들의 프레임 속으로 들어오라고 재촉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기록 매체인 사유하는 양은 그들에게 필름 카메라와 같은 기록 매체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보다는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한 영화 그 자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영화가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양도 하나의 삶이 될 수 없다. 사람들이 영화에 대해 욕망하듯이 양의 가족들도 끊임없이 양에 대해 욕망한다. 영화는 삶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양에게 진짜 삶을 강요한다. 양이 작동을 멈춘 날, 슬픔을 느끼는 사람은 양의 동생인 미카뿐이다. 양의 실질적 부모이자 주인인 제이크와 카라는 형제를 잃은 미카의 슬픔과 양의 수리 보증에 대해서만 골머리를 앓을 뿐이다. 이렇듯 안드로이드인 양에 대한 미카의 사적인 감정은 초반엔 유아적인 감정으로 치부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러한 미카의 태도는 안드로이드가 기계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작용하는 것 즉 어릴 적 인형이 살아있는 것만 같은 원초적 욕망을 뜻하는 듯하다. 이러한 원초적 욕망은 제이크와 카라에게도 전이되고 이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도 하나의 판타지적 욕망으로서 작용된다. 이는 결국 영화에 대한 욕망이다. 마치 3D영화용 안경과 비슷한 안경을 쓰고 제이크가 양의 메모리 뱅크를 탐험하는 도중 미카가 와서 그에게 영화를 보고 있냐고 물을 때 그는 영화가 아니라고 정확하게 답하지 못하고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다고 답한다. 다큐멘터리는 실제의 삶과 가장 밀접한 영화 장르이며, 실제 하는 것을 찍은 것이기 때문에 이 또한 양의 메모리가 실제 하는 삶에 기초하는 것이기를 바라는 제이크의 내재된 욕망의 발현일 것이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는 영화의 시작이며, 결국 양이 담아내고 있었던 것은 하나의 삶이 아니라 영화라는 것을 뜻한다.
영화와 삶이 철저히 구분 되어가는 시대 속에서 제이크와 카라가 양의 메모리 뱅크를 탐구할 때, 관객들은 그들과 같이 욕망한다. 양이 영화 그 자체이기를, 양이라는 안드로이드가 또 다른 인격체로서 작용하는 것이기를. 그러나 카메라가 없이는 영화가 없듯이 양이 없는 다큐멘터리의 존재는 관객들에게 아련함만을 제공할 뿐이다. 양이 담아내고 있던 것이 영화가 되어버리면 양은 그저 영혼이 없이 육신만이 존재하는 미래의 기록 매체가 돼버리는 현실이 극의 아이러니를 극대화한다. 애프터 양은 이런 기록 매체에 대한 근원적 사유를 통해 원초적 욕망을 이야기하며 그 욕망을 통해 관객을 극에 중심에 놓이게 한다. 그들이 영화를 통해 보는 것은 양의 기록일 뿐이며, 양의 추억이 아니다. 양에 대한 판타지는 존재한다고 믿어왔던 것에 대한 배반적 그리움이자, 영화는 현실이 될 수 없다는 냉정한 단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