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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여행 : 스위스 인터라켄

애초에 완벽한 여행은 없으니까

by 이사공

해가 늦게 지는 이곳에서는 긴긴 이동을 마치고, 호수에 나와 지치도록 수영을 했는데도 여전히 사위가 대낮같이 밝았다. 호수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동네 구경을 하며 걷기로 했다. 짐을 챙겨 일어나려는데 호수를 가로지르는 유람선이 보였다. 마침, 우리가 있는 호숫가에 정박한 채로 승객들을 하나둘 태우고 있는 참이었다. 우리가 갖고 있는 패스로 탑승이 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배가 출발할세라 수영복 차림을 한 채 엉거주춤 다가갔다. 탑승을 안내하는 분에게 우리도 탈 수 있는 건지 여쭤보자 '물론이지' 하는 미소를 지으며 타라고 손짓해 주셨다. 우리는 몸에 남아있는 물기만 어찌저찌 처리하고 허겁지겁 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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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느릿 물 위를 가로지르는 배 위에서 몸을 늘어뜨린 채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호화롭게 느껴졌다면 내가 너무 소박한 걸까? 그저 호수를 오가는 자그마한 유람선이었지만, 배에서 내다보는 풍경이 그런 기분을 들게 했다. 호수와 자연, 그리고 어느 것 하나 튀는 일이 없이 잘 어우러진 건축들.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그 풍경이 알아서 내 눈앞을 지나가 주니 이것이 호화로움이 아니면 무엇이 호화로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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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스위스인이 우리에게 말했다. 융프라우에 가지 말라고. 한 분은 체르마트 에어비앤비의 호스트였고, 그녀는 여러 번 반복해서 말했다. 융프라우에 올라가지 말라고, 유럽의 지붕은 의미가 없다고. 다른 한 분은 열차 플랫폼에서 만난 머리가 하얗게 세고 체구가 자그마한 할머니셨다. 그녀는 쉴트호른이 더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곤 정했다. 그래, 쉴트호른으로 가서 융프라우를 바라보자.


그분들의 요지는 아마도, 융프라우에 가면 융프라우를 볼 수 없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매우 비싼 가격도 현지인들이 추천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였으리라. 그래도 유튜브 영상들로 보는 융프라우는 너무나 멋졌다. 융프라우에 가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하는 것은 아닐까? 후회, 여행을 하면 늘 후회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속에 스멀스멀 자라나곤 한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우리는 모든 것을 선택할 수는 없다. A를 고르면 B를 잃게 되는 상황은 여행 때마다 마주한다. A와 B 중 무엇을 선택한 내가 가장 행복할까? 그것은 영원히 알 수 없다. A를 선택하면 평행우주에 있을 B를 선택한 나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빠지다 보면 결국 무엇을 선택하건 후회라는 내리막으로 굴러떨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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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후회는 참 쓸모없는 것이다. 과거의 선택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 성장의 발판이 된다면 건강한 후회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런 경우에서의 후회는 해결할 방법도 없고, 후회할 만한 일인지에 대한 판단 자체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해보지 않았기에 내가 포기한 그 선택지가 후회할 만큼 좋은 선택이었을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후회라는 것은 내리막을 굴러가는 자전거 바퀴와도 같아서 한번 시작하면 여간해서는 멈추기가 어렵다. 퍽 괴로운 마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 때는, 심지어 시작되지도 않은 후회가 겁이나 망설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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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 나는 간단한 주문을 외운다. ‘다음에 또 오면 되지!’. 사실 다음은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멀리까지 나오는 것이 또 언제 있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당장은 다음을 기약하며 후회할까 봐 겁이 나는 마음을 물리쳐 본다. 걱정이라는 것은 참 얄팍하게도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더라. 그렇게 물리치고 내가 선택한 방향으로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내가 했던 걱정, 후회할까 봐 멈칫하던 두려움은 없었던 일처럼 흔적조차 사라져 버린다. 애초에 완벽한 여행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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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만일 정말로 후회가 된다면 다시 오면 된다. 다시 오지 못할 이유는 없다. 모두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여기까지 오는 비용이나, 긴 시간을 내는 것이 우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고 큰 각오가 필요하지만, 그보다도 후회되는 마음이 더 괴롭다면 만사 제쳐두고 다시 한번 큰맘을 먹어보면 되는 일이다. 결국은 또 나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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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끼고 자리 잡은 자그마한 마을을 구석구석 걸어서 내려오는 길이 좋았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 아침에 잠에서 깨 창문의 커튼을 젖히면 눈앞에 이런 풍경을 마주하는 것이겠지? 정말 호사스러운 아침이구나. 이런 자연에 둘러싸여 사는 사람들은 화날 일도 없겠지?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보았다. 화가 나면 집 앞 정원에 나가 산들을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지 않을까? 나라면 그럴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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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가로지르는 내리막을 내려온 우리는 내친김에 다음 마을까지 마저 걷기로 했다. 다음 목적지는 라우터브루넨. 지도상 꽤 떨어져 있긴 했지만 못 걸을 정도의 거리도 아닌 것 같았다. 이름 모를 산들이 너무 멋져서 걷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유난히 멋진 산들 S은 지도를 켜서 이름을 찾아보곤 했지만, 그것도 지칠 정도였다. 이름이 뭐 중요하겠나, 모두 인간이 붙여준 것일 뿐인데. 산들은 인간처럼 복잡한 사정 따윈 없다. 긴 시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도 지도를 뒤지던 손을 슬그머니 내려두고 편안히 바라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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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잠시 베른을 거쳤다가 스위스 여행의 마지막 도시, 루체른으로 향한다. 어차피 지나는 김에 베른도 조금 걸어보자 싶어서 역사에 짐을 맡겨두고 도시 구경에 나섰다. 베른은 맑은 강이 가로지르는 자그마한 도시였다. 그 물에도 영락없이 사람들이 수영을 하고 있었다. 짧은 경험에서 받은 인상이니 내가 틀릴 수도 있지만, 유럽의 도시들은 우리나라보다 물과 산에 관해서는 규제나 규칙이 적은 느낌이었다. 물이 그곳에 있고 내가 들어가고 싶으면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책임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 어디서부터 떠내려온 사람들인 건지, 수영이라 할 만한 몸짓도 거의 하지 않은 채 그저 유속에 몸을 맡겨 떠내려오는 사람들이 걱정 없이 편안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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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을 거닐다 보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비싼 물가 때문인지 점심시간이 되자 많은 사람들이 공원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꺼내기 시작했다. 근처 마트의 포장 음식들도 삽시간에 동이 나버리더라. 거리에 앉아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을 보고, 또 그 사람들을 흉내라도 내듯 한자리 잡고 앉아 밥을 먹고 있으니 여행 때마다 느끼곤 하는 피상적인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나의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내심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행자고 이방인이다. 그러니 눈에 마치 요술 안경이라도 걸쳐둔 듯 모든 풍경이 아름답고, 모든 이가 즐겁고 행복해 보인다. 나에게는 이것이 일상이 아니므로. 참 속 편한 생각이다. 이곳의 사람들이라고 우리와 다를 리 있겠나. 각자는 나름대로 치열하고, 열심이며, 하루하루는 버거울 때도, 감사로 가득 찰 때도 있는 법. 그럼에도 이방인인 나는 마음에 드는 색지를 꺼내 들어 그들의 모습을 공들여 포장하고 있다. 나도 누군가에겐 부러움의 대상으로 비칠 때도 있겠지. 부러움이란 것은 잊고 있다가도 불현듯 솟아오르곤 한다. 마음에 형태가 있다면 부러움은 참 못난 녀석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내가 가진 것들에 눈멀고, 남이 가진 것만 콕 집어 찾아내는 마음이기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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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도시를 걸으니 편했다. 조금 걸으면 슈퍼마켓이 있고, 거기서 더 걸으면 야외 좌석이 잔뜩 깔린 카페가 있다. 맛 좋은 커피며 빵은 발에 채게 널렸다. 길은 새카맣고 매끈하게 잘 포장되어 있으며, 자그마한 유럽의 차들은 정신없이 오간다. 사람들마저 조금은 더 바빠 보이더라. 얼마나 산에 오래 있었기에 도시 풍경이 새삼스러운 건지 인간은 정말 적응의 동물인가 보다. 다음 도시 루체른에선 어떤 시간을 보낼지 머리에 그려보며 낯선 열차에 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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