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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여행 : 스위스 루체른

사진 찍으러 가는 여행

by 이사공

스위스 일정의 마지막 도시 루체른에 도착했다. 입국절차 따위가 없는 기차를 타고 여러 나라와 도시를 여행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축복인가. 루체른은 북적이는 도시였다. 루체른을 대표하는 1300년대 목조다리인 카펠교를 구경하러 거리로 나갔다. 600살이 넘어 유럽에서 가장 길고 오래된 목조다리라지만, 여전히 현역인 그 다리를 보며 가치에 대해 생각했다.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1993년 화재로 많은 부분이 소실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발길이 닿지 않는 어딘가에 모셔두고 고립시키는 것보다 본디 가진 기능을 잃지 않도록 부지런히 수선하며 사용하는 것. 귀한 목조문화재들이 소실된 가슴 아픈 역사가 많은 우리도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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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펠교가 놓여있는 로이스 강변으로 호프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중요한 축구경기가 있는 것인지 같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열띤 응원전을 벌이고 있었다. 루체른과 관련된 경기는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이리쉬 펍에서 스코티시 프리미어십 축구 경기를 보며 응원하는 중이었다. 아마도 경기는 순항 중. 흥분한 사람들은 맥주캔을 던지기도 하고, 카펠교에서 마주친 같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은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격앙되어 있었다. 축구를 하나도 모르는데도 괜히 저들이 내뱉는 그 열기가 즐거워 보여 나도 저런 취미 하나쯤 만들어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열광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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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근처 마트에 들러 가볍게 파스타를 해먹을 재료들과 와인을 한 병 샀다. 지나고 보니 이번 유럽 여행에서 와인을 더 많이 사 먹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된다. 온종일 걷느라 지친 탓에 시원한 생맥주를 들이켤 생각 밖에 못했다. 와인 맛을 잘 모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한국에 비해 저렴하고 맛 좋은 와인들이 많은데 그냥 지나쳐 버린 것이 후회되더라. 자그마한 숙소 주방에서 오일 파스타를 해 먹고 발코니 테이블에 앉아 와인도 한 모금 마셨다. 숙소가 번화가에서 가까워 식사를 하고 나서도 남는 시간엔 가벼운 차림으로 거리로 나가 걸어 다니기 좋았다. 틈만 나면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이는 탓에 매번 숙소에 머문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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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선을 타고 리기산으로 향했다. 스위스의 높은 산들은 열차를 타고 오를 수 있어 편하더라.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런 산그리메를 구경해도 되는 것인지. 저 산들에 소복이 깔린 잔디는 누가 다 심고, 어째서 길쭉한 잡초 같은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지 신기했다. 누군가 저 넓은 땅을 다 손볼 리도 없는데 말이다. 집 앞 정원에 손바닥만 한 잔디만 깔려도 손이 이만저만 가는 게 아니던데, 어떻게 스위스 산들은 부드러운 나이프로 바른 크림처럼 잔디가 곱게 깔려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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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들에서 자주 언급하는 한국 여행객들의 특징 중 하나는 사진 찍기에 열중한다는 것이다. 멋진 풍경을 눈에 담지 못하고 사진만 찍다 돌아간다는 소리다. 여기엔 물론 한국인 스스로를 돌아보는 자조적 의미도 있을 것이다. 우리 둘도 다르지 않다. 애초에 이 유튜브 채널을 시작한 것도 우리의 여행을 조금 더 기록으로 남겨보고자 하는 데서 출발했으니까. 여행이 귀한 우리는 기록을 게을리할 수 없다. 눈에 담는 것의 가치를 모르는 바 아니나 그 또한 사치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하루는 숙소 문을 나서며 이런 다짐을 해 보았다. '오늘은 사진을 최소한만 찍고 순간을 내 눈에 담는 일에 몰두해야지!' 물론 이 다짐은 보란 듯이 실패했다. 순식간에 휘발될 내 기억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억력은 왜 영원하지 않은 건지. 초단위로 일어나는 기억하고 싶은 순간, 순간에 사진과 영상으로 불멸성을 부여하고 싶어 애가 탄다. 결국 카메라는 내도록 내 손을 떠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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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어떤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유럽 사람들은 여행을 와서도 사진을 찍지 않고 눈에 담아 가기만 한다던데, 과연 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런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고. 단지 오래되어 유물같이 느껴지는 구형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나온 어르신들을 몇몇 보아서 특이하다 생각하긴 했다. 물건을 오래 쓰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가 싶었다. 그들도 예외 없이 바쁘게 사진을 찍는다. 한국인들보다 사진 찍는 기술은 별로이지만 열심이다. 여행 가서 사진 찍고 기록하는 것을 흉처럼 이야기하는 일은 못된 심보다. 그들이 셔터를 누르는 그 행위에는 이 순간을 소중히 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휘적휘적 내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기억을 최대한 붙잡아보려는 절박함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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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참 많다. 타인의 여행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쉽게 첨언하기도 하고, 어디 어디를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의 협박인지 추천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말들도 많다. 필수 코스, 인생 맛집, 현지인 추천. 성공적인 여행을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여행에도 성공과 실패가 있을까? 취향만 있는 것은 아닐까? 남들 보기 그럴듯한 여행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여행 말미에 채점을 하여 100점 만점을 받을 요량인 것도 아니니, 여행에 있어 성공, 실패는 유효한 개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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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듯 내 키의 절반에 가까운 거대한 가방을 다시 짊어졌다. 이동의 시간은 금세 다가오고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할 때마다 길게 늘어져있던 한 달 치 여행 계획들은 점점 더 짧게 쪼그라든다. 짐을 풀었다 다시 짊어질 때마다 벌써 이 도시와 이별하는구나 실감이 난다. 다음 도시는 뮌헨이다. 스위스 취리히를 잠시 경유해 뮌헨의 숙소로 이동한다. 취리히에서 반나절 대기하는 시간에도 우리는 이 도시를 구석구석 거닐었다. 이 날은 취리히 사람들의 여름 축제, <취리히 리마트 스윔>을 하는 날이었다. 1년 중 하루, 취리히를 가로지르는 리마트 강에서 합법적으로 수영을 할 수 있는 날이다. 접수처에서 나누어준 노란 튜브를 끌어안은 사람들은 그저 가만히 물에 몸을 맡긴 채 흘러가고 있었다. 사전 접수가 필요한 행사라 우리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둥실둥실 떠내려가는 사람들이 그 순간 세상 가장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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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정말 스위스를 떠날 시간이 되었다. 취리히는 몇 시간 남짓 걸은 게 전부라 아쉬움이 컸다. 뮌헨으로 향하는 버스가 들어오고 널찍한 트렁크에 짐을 실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마지막 풍경들을 눈에 담으며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작별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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