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행복
에스프레소와의 인연은 결혼 후 유럽 배낭여행에서 시작되었다. 로마 콘도티 거리의 노상 카페에서 처음 마신 진한 커피 한 잔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한 시대의 문화이자 철학처럼 느껴졌다. 하워드 슐츠가 그 경험에서 영감을 받아 스타벅스를 창업했다면, 나는 그 순간부터 에스프레소를 일상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로마에서 처음 에스프레소를 접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스타벅스에서 다시 마셨다. 에스프레소가 생소해 주문할 때마다 원액이라 진한데 괜찮냐는 질문을 받았다. 점차 깊은 맛에 익숙해졌고, 더 편하게 마시기 위해 에스프레소 머신을 주문했다. 직접 원두를 사서 분쇄기로 갈아 마셨고, 커피 한 잔이 주는 만족감은 점점 커졌다.
원두를 사서 직접 갈아 내리는 과정이 번거로워 파드 커피로 바꾸었다. 파드 커피는 갈아낸 원두가 하나씩 포장된 형태로 간편하게 내려 마실 수 있어 편리했다. 에스프레소를 추출한 후 물을 추가하면 아메리카노, 얼음을 넣으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즐길 수 있었다. 일부 기기는 우유 거품을 낼 수 있어 라테나 카푸치노도 만들 수 있다.
사정이 있어 한동안 1년 넘게 머에스페소 머신은 행정실 정수기 위에 방치되었다. 오랜만에 먼지를 털어내고 물통을 깨끗이 씻었다. 파드를 주문하려고 보니, 익숙했던 브랜드들은 자취를 감췄다. 30종이 넘던 파드 커피는 5종만 남아 있었고, 즐겨 마시던 무세티와 르카페는 사라졌다. 선택지가 사라지는 기분은 아쉬움을 넘어선 상실감이었다. 어쩔수 없이 남은 몇종을 주문했다.
오랜만에 태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7년 만이다. 성수기라 호텔 가격이 크게 올랐고, 예전에 머물렀던 강건너 페닌슐라 호텔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였다. 결국 적당한 가격대의 도심 호텔을 선택했다.
7년 전 페닌슐라 호텔 창문에서 보였던 커다란 공터는 방콕에서 가장 핫한 쇼핑몰로 변해 있었다. 아이콘시암은 지하 음식점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몇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내부는 고급스러운 브랜드 매장과 다양한 음식점들로 가득했고, 실내 정원과 대형 분수까지 갖춰져 있었다.
강을 건너는 배들은 쉴 새 없이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며, 쇼핑몰 주변은 활기로 넘쳐났다. 야외 무대에서는 라이브 공연과 분수쇼가 펼쳐져 많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쇼핑과 엔터테인먼트가 어우러진 공간으로 변한 이곳은 과거의 공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새로워 보였다.
쇼핑몰을 나와 간단한 안주와 함께 와인을 한잔씩 하고, 쇼핑몰에서 가까운 힐튼 호텔로 향했다. 호텔 뒤편에는 예전에 자그마한 전통시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쌀국수를 먹고, 아기자기한 소품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막상 가보니 시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황량한 빈터만 남아 있었다. 멀리서 사람이 보이면 오히려 움찔할 정도로 휑한 공간이 되었다. 익숙했던 장소가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그곳에 남아 있던 추억이 지워지는 기분이었다.
대형 쇼핑몰 지하의 슈퍼마켓을 둘러보았다. 아내는 태국에서만 구매할 수 있는 식재료들을 살펴보느라 바빴고, 나는 따분함을 달래며 진열대를 거닐다가 한쪽에 놓인 수많은 차들 사이에서 익숙한 브랜드를 발견했다. 킴보? 즐겨 마시던 파드 커피 브랜드였다. 파드가 아니라 네스프레소용 캡슐이라니. 성악가가 시류에 맞춰 트로트를 부르는 듯한 배신감.
이내 이해가 됐다. 킴보도 시장의 흐름을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팔리지 않는 파드를 계속 생산할 수는 없었겠지. 네스프레소를 비롯해 수십 종의 캡슐 커피가 진열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베타와 VHS 비디오테이프의 경쟁이 DVD를 거쳐 넷플릭스로 대체된 것처럼, 파드 커피도 캡슐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파드도 소프트와 하드의 경쟁이 있었다.
휴가에서 돌아온 뒤 주말에 백화점 네스프레소 매장을 방문했다. 네스프레소는 최근 새로운 커피 머신을 출시했다. 이 머신은 기존 모델과는 다른 전용 캡슐을 사용해야 한다. 많은 회사들이 네스프레소 호환 캡슐을 제작하며 경쟁이 심화되자, 네스프레소는 독자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새로운 모델을 출시했고, 이에 맞춰 파격적인 할인 행사도 진행되고 있었다. 기존 기기의 가격은 크게 인상되었고, 할인폭은 줄어들었다. 캡슐 시장을 독점하려는 전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점뿐만 아니라, 최신 기술을 적용한 기기와 새로운 추출 방식에 최적화된 캡슐을 개발해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오랜만에 마신 파드 커피는 종이 맛이 났다. 내 입맛이 변한 것인지, 아니면 품질이 저하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저가의 테이크아웃 커피가 오히려 더 나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함께해온 파드 커피를 이렇게 쉽게 떠나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익숙한 맛을 지키고 싶었지만,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느낌이었다.
캡슐 커피 머신을 살지 말지 일주일 동안 고민했다. 익숙한 것을 고수할 것인가,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일 것인가. 고민 끝에 결국 선택했다. 망설임은 선택을 위한 과정일 뿐이니까.
캡슐 커피의 맛은 기대 이상이었다. 기술의 발전이 주는 편리함을 무시할 수 없었다. 원두를 갈아 정성스레 내리던 시간을 떠올리며, 변화의 흐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는 맛있었고, 기기는 편리했다. 파드 머신보다 크기가 작고 디자인도 세련됐다. 한때 하루 다섯 잔씩 마시던 에스프레소 열정이 다시 살아났다. 한두 잔으로 유지하던 습관이 세 잔으로 늘었고, 네 잔째를 마실지 고민할 정도였다. 디카페인도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원두에서 파드로, 파드에서 캡슐로 변화했지만, 여전히 본질은 에스프레소였다. 방식은 달라졌어도, 한 잔의 커피에서 시작되는 하루, 진한 향과 깊은 맛이 주는 만족감은 변하지 않는다.
새로운 기술과 트렌드가 끊임없이 등장해도, 본질은 같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커피 한 잔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여유와 작은 행복이다.
여정의 끝에서, 다시금 에스프레소 한 잔을 들고 있다. 한 모금 머금으며 생각한다. 익숙한 것을 지키려는 마음과 변화 속에서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과정. 방식은 변했지만, 여전히 커피 한 잔이 주는 위로와 만족은 같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변화 자체가 아니라, 변화를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일지도 모른다. 변화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주도하며 나만의 방식으로 즐기는 것.
진정한 커피의 맛은 원두의 종류나 추출 방식에만 있지 않다. 커피 한 잔에 담긴 기억과 감정이야말로 그 맛을 결정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완벽한 균형을 찾으려면 변화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익숙한 것을 지키기도 해야 한다. 그 안에서 가장 나다운 맛이 우러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