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나체를 경험하다
연우가 일하는 곳은 빌딩 1층. 학원은 같은 건물 2층. 하루 일과가 끝났다. 직원들에게 마무리를 부탁하고, 미리 약속해둔 시간에 맞춰 2층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벽면이 유리로 된 오른편 방에 선생님이 보였다. 녹음 부스가 있는 학원에서 가장 큰 방이다. 연장한 속눈썹과 상담 때와는 다른 손톱 색깔이 눈에 띄었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고 있다. 아이 눈에는 연우가 학부모? 아니면 선생님의 지인으로 보였을까?
연우와 학생 사이에 흐르는 몇 초의 어색함. 선생님은 오늘부터 취미로 보컬 수업을 받을 거라 연우를 소개했다. 아이는 쓱 한번 쳐다보곤 쌩하니 사라졌다. 꾸벅 인사라고 바랬을까? 또래도 아닌 연우는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악보 가져오셨어요?"
상담 때 수업 시간을 정하며, 간단한 평가를 해야 하니 평소 즐겨 부르는 노래 몇 곡을 준비해 오라셨다. 노래방에서 부르던 수십 곡의 리스트. 그중에 자신 있었고, 주위 반응도 좋았던 두곡을 골랐다. SG워너비의 라라라, 토이의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
"네? 악보요?"
성악을 전공했고, 지금은 무대에서 재즈 보컬을 맡고 있는, 대학에서 실용음악을 강의하고, 많은 입시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에게 연우는 오늘 아침 아파트 입구를 지나던 번호도 기억나지 않는 버스가 아닐까? 입시반은 유명 대학에 입학하거나, 경연대회 방송이라도 탈 가능성이 있지만, 취미반은 치열함이 없다 보니 노력에 한계가 있다.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선생님의 쩌렁쩌렁한 소프라노의 음성에 연우는 벌써 기가 죽었다.
입시생이라면 당연히 챙겼을 악보. 학원 등록도 했는데, 당연히 미리 알려줬어야 하지 않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당장 F학점 낙제를 시킬 카리스마에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인터넷에 악보를 검색하면, 악보바다, 악보공장, 악보가게 다양한 사이트가 있어요. 보시고 마음에 드는 사이트에서 악보를 사서 두부를 출력하세요. 한부는 연습할 때 보셔야 하고, 한부는 수업할 때 저에게 주세요. 그래야 제가 반주를 할 수 있잖아요? 그리고 악보는 악보파일에 넣어 다니세요. 그게 뭔지 모르는 눈치네요. 선물로 제가 하나 드릴게요. 이렇게 중간이 비어 있어서 악보에 필기를 할 수 있게 되어 있어요. 오늘은 악보가 없으니 인터넷에서 악보를 찾아볼게요.
"이제 부스 안으로 들어가세요."
통유리로 된 부스 앞에는 다 쓰기는 할까 싶은 많은 버튼이 있는 기기, 좌우 두 개의 스피커, 커다란 모니터 두 개, 마이크, 건반이 있었다. 선생님은 모니터에 악보를 띄우고 건반 앞에 앉았다.
부스 안의 벽은 스펀지로 방음처리가 되어 있었다. 발소리, 숨소리, 폰을 만지는 소리, 연우의 목소리. 모든 소리가 부스 안에서는 짧았다. 잔향이 없어서였다. 모든 소리를 방이 가두어버렸다. 평소와 다른 소리의 느낌이 긴장을 만들었다.
중앙에 놓인 스탠드에는 60년대 영화에서 보던 네모난 마이크가 꽂혀 있었고, 옆에 헤드폰이 걸려 있었다. 마이크 앞에는 악보를 꽂도록 보면대가 놓여 있었다. 선생님은 헤드폰을 쓰라는 손짓을 하셨다.
티브이에서나 보던 녹음 부스 안에서 역사적인 첫마디.
"마이크 손으로 만지지 마세요!"
교회의 십자가만큼이나, 마이크는 노래하는 사람에게 신성한 소품이었다. 초보자들이 긴장해서 만지다가 떨어뜨려 고가의 마이크를 몇 번이나 깨 먹었다고 한다. 스탠드를 조절해 높이와 위치를 맞춰야지 마이크는 손으로 만지면 안 된다는 핀잔에 또다시 주눅이 들었다.
티브이를 보면 가수들이 한 손으로 헤드폰을 쥐고 한쪽 귀로 반주를 들으며, 다른 한 손으로 가사가 적힌 종이를 들고 노래를 부른다. 밖에서 프로듀서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반주를 끄고, 좀 전의 그 부분은 1절보다 더 애절한 상황이니 감정을 조금 더 고조시켜 표현하면 어떨까 말하면 가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갈게요 하면서 다시 노래를 시작한다. 프로듀서는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낸다.
현실은 높이가 맞지 않는 마이크 스탠드도 제대로 조절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고가의 마이크를 떨어뜨릴까 신경 쓰여 높이에 맞추느라 등을 살짝 구부렸다. 마이크와 입 사이에는 까만 망의 필터가 있다. 필터 앞으로 입을 가까이하려니 목과 등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가사를 봐야 하는데 마이크 뒤로 가려진 스마트폰 화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시작할게요. 부담 가지지 마시고, 평소에 하던 것처럼 하시면 돼요."
반주가 시작되었다.
그대는 참 아름다웠죠~
초등학교 때 합창단을 했다. 중학교 때도 합창단을 했다. 대학교 오리엔테이션 가는 버스 안에서 유일하게 앙코르를 받았다. 전자 기타가 취미라는 선배는 오리엔테이션 내내 다른 선배들에게 노래 잘하는 후배라며 소개했다. 학과 축제 때도 노래를 했다.
모든 운동에 잼병이고, 사람 앞에만 서면 떨리고 버벅거려 말을 제대로 못하는 연우. 노래 마이크만 잡으면 어떻게 저런 끼를 숨기고 살았을까 반전 매력의 주인공이 되었다.
동아리 회식, 학회 망년회, 장모님의 칠순 잔치, 결혼식 하객을 싣고 달리는 전세버스 안, 데이트 코스로 들린 노래연습장. 모두 연우의 노래에 놀랐다.
헤드폰으로 들려오는 반주에 맞춰 노래를 시작했다. 한 눈을 감고 끝을 맞추면 어긋나기만 하는 손가락처럼 박자가 맞지 않았다. 노래연습장에서는 갑자기 마이크를 넘겨받아도 박자를 곧잘 맞췄는데, 장난친다고 음정을 아래 위로 바꿔도 금세 맞췄는데, 음정이 전혀 맞지 않았다.
게대가 발음은 또 왜 이렇지? 뉴스에서 일반인이 인터뷰할 때의 어색한 말투처럼, 초등학생이 국어책을 읽듯 노래 가사를 발음하는 자신의 목소리와 가사를 말하는 말투가 귀에 거슬렸다.
두 소절만에 노래를 중단했다. 선생님의 반주도 중단되었다. 밖으로 나오세요라고 선생님이 말했다. 헤드폰을 벗어 마이크가 다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스탠드에 걸고 밖으로 나왔다.
문 밖은 시원했다. 겨우 몇 분의 시간. 얼마나 긴장했던지 목과 어깨가 결렸다. 머리 밑과 겨드랑이는 땀범벅이었다.
연우가 생각했던 장면은 이렇지 않았다. 연우의 노래를 듣는 선생님의 눈이 점점 커진다. 지나가던 학원생들이 모여든다. 재야 고수의 등장에 모두 깜짝 놀란다. 어떻게 이런 재능을 아껴두고 있었나며 선생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부스 안은 마법의 공간이었다. 어플을 지우고 보는 쌩얼처럼, 목소리의 가식을 다 벗겨 듣게 만드는 고문의 공간이었다. 잔인하고 부끄러웠다.
너목보의 고수가 아니라, 음치가 맞을 것 같았다. 도레미도 제대로 못 치는 쌩초보 유치원생이었다.
대부분 이렇다고 했다. 노래를 배우지 않은 일반인은 짙은 화장을 한 듯 소리를 치장해주는 노래연습장 마이크에 익숙해, 가식을 뺀 자신의 목소리에 노래에 당황한다고 한다.
"앞으로 노래연습장 가지 마세요!"
노래를 맘껏 부르고 싶어 시작한 보컬 트레이닝인데, 노래를 하지 말란다.
화장을 벗겨낸, 어플과 뽀샵을 더하지 않은 본연의 모습을 알아가는 것이 보컬 트레이닝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