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트러블러의 인생 슬럼프!
내가 CPL(Commercial Pilot License, 사업용 조종사자격증)을 취득한 시기는 국내에 LCC(Low Cost Carrier, 저비용항공사) 붐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시기여서 상반기, 하반기로 나누어 2번씩 조종사를 채용하는 LCC항공사가 있을 정도로 조종사 수요가 많았다.
그런데 수요에 못지않게 공급도 많아지면서 상반기, 하반기 채용에 다 떨어지고 재수를 하는 예비조종사도 많아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1년만 더 빨리 알고 준비했다면 훨씬 수월하게 많은 기회를 가졌을 텐데'라는 생각도 잠깐 했었으나,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 속만 쓰리지' 하면서 웃어넘겼다!
B항공사의 필기와 SIM시험을 통과 후 분위기 좋게 면접까지 끝냈으나 기대와 다른 결과를 맞이하고 상심할 시간도 없이 내가 가고 싶어 하던 C항공사의 공고가 올라왔다.
C항공사의 채용이 마무리되면 항공사들의 상반기 조종사 채용이 마무리될 것 같았다. 이때가 회사를 그만둔 지 딱 2년이 되는 시기였는데 억 소리 나게 하늘에 돈을 뿌려 데다 보니 퇴직금은 물론이고 곳간에 모아두었던 자금이 거의 다 털려가고 있던 상황이라 상반기 안에 결과를 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C항공사도 B항공사와 마찬가지로 CPL자격증과 기준 비행시간, 영어점수 등 기본적인 요건만 갖추면 서류는 통과되는 것 같았다.
다음 과정인 필기시험! B항공사의 필기시험장과 마찬가지로 많은 예비조종사들로 시험장이 가득 찼고, B항공사의 시험장에서 만났던 사람들 대부분을 다시 만났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 동기이고, 친한 선후배이지만 동시에 경쟁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시험은 영어로 출제되었는데 익숙한 용어들이 많아서 오히려 우리말로 출제되었던 B항공사의 시험보다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렇게 순풍에 돛 단 배같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C항공사의 지원은 SIM 시험 당일에 역풍을 제대로 쎄게 맞아버렸다.
모든 시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시험 당일의 컨디션 관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전까지 중요한 시험날은 컨디션 관리를 잘해오는 편이었다.
그런데 SIM 시험날은 머리털 나고 시험 봤던 날을 통틀어서 컨디션 엉망 TOP3안에 드는 날이 돼버렸다.
만성 장트러블러였던 나는 이날 새벽부터 뭐가 잘못됐는지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여유 있게 시험장으로 향했음에도 막히는 길에서 화장실을 찾느라 2번이나 행선지를 바꿔가며 어렵게 어렵게 간신히 제시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진이 다 빠진 채 최악의 상태였지만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서 정신력 하나로 SIM시험을 치렀는데 비행기가 하늘로 가는지 땅으로 가는지도 모르게 조종을 하면서 추락시키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시험을 보고 나왔다.
시험이 끝난 당시에는 인생 2막에서 가장 중요한 날에 컨디션 관리를 못한 나 스스로에게 화는 나는데 이상하게도 무덤덤하고 차분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시험결과에 대한 아무 기대도 희망도 없이 체념을 하여서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발표된 결과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탈락 ㅜ.ㅜ 이렇게 원치 않는 일에는 의외의 결과가 절대 나오지 않는 것이 슬픈 현실인 것 같았다.
CPL 자격을 취득하고 1년 내 항공사 취업을 목표로 하기는 했지만 6개월 사이 2번의 실패와 1번의 자격미달을 겪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롭지 않은 상황이 되니 불안감, 조금함이 엄습하고 자신감이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극 E타입으로 사람 만나기 좋아하던 성향이 대인기피증에 걸린 듯 친한 친구들도 피해가며, 은둔의 생활을 좋아하는 성향으로 변해갔다.
이렇게 나는 C항공사까지 속 쓰린 고배를 마시며 상반기 지원을 마쳤지만, 인생 최악의 슬럼프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