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인데도 쌀쌀한 기운 없이 선선한 가을밤이 며칠 계속되었다.
가을을 오래도록 즐길 수 있어 좋긴 하지만 평년과 사뭇 다른 날씨가 맘 한편으로 심각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뭐 길었던 무더위에 대한 보상이려니 생각하며 감사했다.
어느 저녁 식구들 밥상을 차려주고 앞치마를 둘러맨 채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아마도 나는 퇴근 후 허기진 배를 아이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대충 요기를 하였던 모양이다.
주변 집들 사이사이로 저녁노을이 지기 시작하였다.
오렌지빛과 푸른빛이 그러데이션을 이루며 물드는 노을은 그날따라 유난히 아름다웠다.
가리는 것 없이 제대로 보고 싶은 마음에 단지 옆 수변 공원으로 향했다.
단지 울타리 문을 열고 나가면 서쪽 하늘을 막힘없이 볼 수 있다.
홀리듯 울타리 쪽으로 걸어가 쪽문을 열고 시멘트 턱에 엉덩이를 걸쳐 앉았다. 짙어져 가는 노을을 놓치지 않을 새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저녁 공기는 선선했고
환타빛 노을은 어두워져 가는 평화광장의 스카이라인과 대조를 이루며 그림엽서 한 장면을 만들었다. 말로는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황홀했다.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그 순간, 이런 아름다운 자연을 맘껏 누릴 수 있게 아프지 않고 건강한 내가 감사했다.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동할 줄 아는 감성을 갖고 있는 내가 너무 맘에 들었다.
이런 나여서 참 행복했다.
난 왜 이 정도밖에 안 될까?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을 늘 신경 쓰며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앞으로도 뭐 그렇게 살겠지만,
그날의 기억은 내가 나여서 참 좋았던, 선물 같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