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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급한 선수 Oct 01. 2023

인생은 허비되는 것

이라 생각하면 허비하면 안 된다는 강박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이니셰린의 벤시> (2022)


  글쓰기 창을 열고, 빈 화면에 깜빡거리는 선을 보고만 있다가, 도저히 쓸 말이 없어서 방을 나갔다. TV를 보던 아버지가 나를 불러 세우고는 올해가 몇 년도냐고 물어보셨다. 요즘 섬망기가 있으신 거 같아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2023년이라고 말씀드렸다. 돌아오는 말이 그런데 왜 TV에는 '항저우 아시안게임 2022'이라 적혀있냐는 것이다.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아마 연기가 된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다. 같은 의미를 지닌 여러 형태의 말씀을 하셨다. 그게 무슨 말이냐, 이해가 안 된다, 올해가 2023년인데 왜 2022년이라고 하냐 등등. 딱히 내가 필요한 거 같지도 않은데 왜 불렀나 싶다. 올라오는 짜증을 숨기기 위해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한 마디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들을 마음이 없는 건 아니고?"


  영화는 이니셰린이라는 섬을 배경으로 발생하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니셰린은 자기 집에서 친구 집에서 나는 연기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좁은 섬이다. 그리고 술집에서 따로 앉기만 해도 섬사람들이 둘이 싸웠냐고 물어볼 정도로 지루한 섬이다. 파우릭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인생을 낭비한 사람이고, 콜름은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데 인생을 허비한 사람이다. 이 둘은 남들이 보기에는 어제까지만 해도 친구였다. 파우릭은 아직도 친구라고 믿는다. 콜름은 파우릭이 제발 닥쳐주길 바란다. 친구라고 생각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매일 마주하는 사람이었을 뿐일지도.


  콜름은 파우릭의 동생인 시오반과 모종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둘은 딱히 친해 보이지는 않지만 이니셰린에서 유일하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관계이다. 파우릭은 오랜 세월을 함께 해도 몰라서 따져 물어야 하는 것을 시오반은 이미 알고 찾아가 간단한 대화를 통해 서로의 의사를 확인한다.


  콜름은 분명 다정한 사람이다. 경관의 저급한 이야기를 군말 없이 들어주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저렇게 지루한 이야기를 참다니. 동시에 일관성이 결여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파우릭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랑 경관의 저급한 이야기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경관이 가진 권력에 적당히 순응하는 태도라면 더욱 이상하다. 내면적 완성을 위해서 거추장스러운 관계를 덜어내고자 하는 결심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콜름이 결심을 통해서 덜어낸 건 멍청하고 만만한 파우릭과 자신의 손가락 몇 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파우릭이 경관에게 한방 먹이는 장면에서 모종의 쾌감을 느끼지 않았던가? 콜름이 보여줬던 단호함과 폭력성에 비해서 다짐의 내용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폭력성은 영화 전반에 긴장감을 선사한다. 콜름은 마치 교관이 훈련병을 대하듯, 강형욱이 개를 훈련시키듯이 자극과 반응을 활용해 파우릭의 행동을 교정하고자 한다. 자극과 반응에는 설명이 필요 없다. 단지 원하는 행동이 나올 때까지 자극을 선사할 뿐이다. 콜름도 마찬가지로 파우릭이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보이자 즉각적으로 단절과 손가락이라는 자극을 선사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는, 그의 계획은 목적을 이룬다. 콜름의 폭력성이 초래한 비극 덕분에 촉발된 분노에 따르는 동안, 파우릭은 여태껏 보여준 적 없었던 성숙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둘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순간에 도달해서야 콜름과 파우릭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게 된다는 점이다.


  거듭되는 좌절을 거치면서 콜름이 파우릭에게서 변화의 여지를 지워버렸어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비정상적인 사람들만 가득한 세상에서 폭력은 의도를 실현하기에 쉽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쉬운 건 재미없는 법이고, 재미가 없으면 오래가지 못한다. 사실 나만 정상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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