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는 다 했니?
<그 여름날의 거짓말> (2023)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숙제로 기억에 남는 일을 기록하라 했더니, 딱 한 명, 다영이만 제출했다. 내용은 또 기가 막힌다. 남자친구랑 계곡에서 어쩌고 저쩌고. 기억에 남는 일을 기록하라 했지만 남의 연애사를 시시콜콜하게 알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내용이 마음에 걸린다. 아무리 봐도 얌전히 수영만 하다 온 건 아닌 거 같은데, 어쩌자고 이걸 적어냈는지 모르겠다. 자수를 하러 온 건가? 그렇지만 학교는 사법 기관이 아닌데? 일단 사안을 인지하고는 있어야 하니까 진술서는 받지만, 묶인 채 버려진 쓰레기 봉지를 억지로 들어다 보는 느낌이다. 조만간 때려치우던가 해야지.
한바탕 거짓말 소통이 끝나고, GV를 통해서 감독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여전히 다영이가 방학숙제를 제출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은 기분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다 말아서 저 첫 문단은 글의 형태가 되지 못한 채 한 달쯤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다 요즘 독한 감기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문득 무언가 다시 떠올랐다. 건져보니 나의 과거와 다영이의 숙제가 엇비슷한 모습으로 같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딱히 건강하지는 않았지만 한눈에 걱정할 마음이 들 법한 부상은 없었다. 그래서 다행스럽다고는 생각한다. '뼈가 부러져서 마취를 하고 어쩌고 저쩌고'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아픈 건 세상에서 제일 싫다. 그렇지만 남들은 다 거치는 일련의 훈장 같은 과정을 나 혼자만 피할 수는 없었기에 간혹 스스로 꽤 아프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었다. 문제는 그 순간들이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 아파요"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 그냥 그렇게 지나갈 수도 있는 순간들. 내가 봐도 아무렇지 않아서 대부분 말하지 않고 지나갔다. 전염되는 아픔이라면 당장 호들갑을 떨었겠지만 그 흔한 눈병 한 번 걸린 적이 없는 건 조금 억울하다. 어제도 좀비 마냥 업무 시간을 꾸역꾸역 보내다가 문득, 누군가 내가 아픈 걸 좀 알아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말미에서 다영이는 파도가 거칠게 휘몰아치는 바다 앞에서 편지로 전 남자친구가 방학 숙제를 했는지 물어보았다. 누군가가 그 편지는 상대방이 이번 여름방학에 있었던 일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했다. 잊지 않았으면, 알아줬으면, 고통임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나누면 반이 된다고 하니까. 고통이라도 나누면 고통보다 좋은 게 생길 테니까. 부끄러운 순간의 연속이지만 그 와중에 분명 소중한 것이 있을 테니까.
어린아이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분명 현명함은 아니다. 이상하게도 사회가 발전할수록 재빠르게 현명해지지 않으면 더 빨리 탈락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아이들은 현명할 것이 아니라 솔직해야 하는 게 아닐까? 사회는 발전과 다르게 여전히 미성숙하다. 미련한 내가 떠올라서 성숙하지 않은 다영이가 참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