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였다.
우연히 TV에서 미국 드라마 CSI를 봤는데, 그 안의 영어 발음이 어쩐지 숨이 막히게 멋있었다.
말끝마다 굴러가는 리듬, 단어에 묻은 자신감, 그리고 그들이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가 어린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와, 저게 진짜 스웩이구나.’
그날 나는 결심했다. 언젠가 나도 미국에 가야겠다고. 저 사람들처럼 말하고 싶다고.
그때 처음으로 ‘멋있다’고 느낀 단어는 다름 아닌 victim(피해자)이었다.
형사들이 그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마치 분노와 정의가 동시에 터져 나오는 듯했다.
나는 그게 너무 멋있어서, 혼자 화장실 거울 앞에서 중얼거렸다.
“빅팀… 빅! 팀!”
입술을 세게 다물며 과장된 V 발음까지 흉내 냈다.
그땐 몰랐다.
훗날 내가 진짜 미국 생활의 victim 이 될 줄은.
그리고 그 첫 번째 피해자가 내 이름이 될 줄은.
부모님은 내게 넉넉할 유(裕), 주석 석(錫)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
은혜롭고 따뜻한 사람.
그런데 미국에서는, 내 이름이 그렇게 따뜻하게 들리지 않았다.
“Hey, You Suck!” (야, 너 진짜 구리다!)
“Dude, seriously, I’m just saying your name.” (야 진짜, 그냥 네 이름 말한 거라니까.)
“No offense, man, but you really do suck!” (기분 나빠하지 마. 근데 너 진짜 좀 구리긴 해!)
“Bro, I don’t suck. That’s my name!” (야, 나는 안 구려. 그게 내 이름이야!)
처음엔 억울했다.
나는 그냥 김유석일뿐인데, 왜 모두가 웃는지 몰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이름으로 사람들을 웃게 하는 법을 배웠다.
부모님이 말한 은혜가 그런 의미였다면, 나름 잘 실천한 셈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영어 잘하셨을 것 같아요.”
“공부 진짜 열심히 했을 것 같아요.”
그런 말을 상상하면 괜히 웃음이 난다.
사실 나는 평범하다 못해, 거의 평균 아래였다.
외우는 건 질색이고, 중학교 때 영어와는 이미 등을 졌다.
그런데도 늘 이렇게 포장했다.
“공부를 하지 않았을 뿐, 머리는 나쁘지 않아.”
그 말이 나를 위로해 줬고, 어느 순간 믿게 됐다.
그렇게 근거 없는 자신감을 품은 채,
나는 커뮤니티 칼리지 입학서류를 들고 미국행 비행기를 탈 준비를 했다.
두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어딘가 들떠 있었다.
‘이 자리만 벗어나면, 뭔가 달라지겠지.’
그 막연한 믿음 하나로 공항으로 향했다.
커뮤니티 칼리지는 한국에서 흔히 ‘2년제 전문대학’이라 불린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금 다르다.
나처럼 다시 시작해 보려는 사람들이 모인, 어쩌면 두 번째 인생의 대기실 같은 곳이다.
누군가는 새로운 꿈을 찾고, 누군가는 4년제 대학 편입을 준비하고,
누군가는 그저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나도 그중 하나일 뿐이다.
아직 전공도 없고, 목표도 불분명하지만,
서류상으로는 하버드나 MIT 학생들과 똑같이 '미국 대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발음은 여전히 어색하지만,
그래도 나는 오늘, 미국에서의 첫걸음을 내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