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길 위에서
인천국제공항만 보면, 유학길에 올랐던 그날 새벽이 그대로 떠오른다.
무겁지만 어딘가 가벼웠던 공기, 그리고 그 시간에도 분주하던 공항의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부모님과 동생이 나를 배웅하러 와 있던 모습도 잊히지 않는다.
무엇보다, 게이트에 들어가기 직전 엄마가 해줬던 그 길고도 웃기지 않은 잔소리만큼은 지금도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다.
“유석아, 거기 가서 괜히 객기 부리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
특히 너보다 덩치 큰 사람 있으면 절대 눈 마주치지 마, 알았지?
혹시 누가 총으로 돈 달라 그러면 그냥 줘. 엄마가 돈 더 보내줄게. 목숨이 더 중요해, 알겠지?
그리고 영어 못 알아들으면 그냥 ‘노!’ 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지나가.
괜히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잘 생각해서 행동해. 알았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게 된 내가 걱정되셨는지, 엄마는 끝도 없이 잔소리를 이어가셨다.
나는 그저 웃으며 “알았어, 알았어”만 반복했지만,
게이트 앞에 서자 그 웃음이 금세 굳어버렸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이제 정말 혼자구나.
그 길고도 웃기지 않은 잔소리가 등 뒤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가슴 한쪽이 조용히 저려왔다.
나는 애써 고개를 돌리고, 출국 수속대로 향했다.
그때 부모님과 동생이 걱정 반, 응원 반의 눈빛으로 내 등을 바라보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가족들과 마지막까지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누고, 서로 힘내라며 웃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웃음 뒤에 바로 목이 꽉 막히는 기분이 밀려왔다.
보안 검색대 줄에 서자, 마음 한켠이 천천히 뒤섞였다.
별일 아닌데도, 눈물이 자꾸만 고였다.
그때 내 눈에 가장 크게 들어온 건, 벽에 붙은 커다란 경고 포스터였다.
“이것도 금지! 저것도 금지!”
알록달록한 그림까지 붙어 있어서 괜히 더 긴장됐다.
가족과의 이별은 잠시 잊혔고,
‘내 가방에 혹시 뭐 걸릴 거 있나…’ 그 생각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런데 앞사람들이 하나둘씩 물건을 압수당하기 시작했다.
치약, 샴푸, 고추장, 고급 화장품…
직원은 그것들을 가차 없이 가위로 잘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당당하게 신발을 벗고, 가방을 올리고, 몸수색대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직원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방 좀 열어봐 주시겠어요?”
그 순간, 근거 없는 자신감이 폭발했다.
“저는 금지 물품 안 가져왔는데요? 왜 그러시죠?”
직원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100ml 넘는 액체류를 소지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요! 제가 끝까지 다 확인했어요!”
나는 당당하게 지퍼를 열었다.
그리고… 거기엔 아주 든든하게 자리 잡은 홍삼 진액 700ml.
게다가 귀여운 캐릭터 포스트잇에,
동생이 적어준 응원 메시지까지 가지런히 붙어 있었다.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때 가족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며, 눈물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직원은 마치 이상한 사람이라도 본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 이게 700ml라 기내 반입 금지예요. 바로 폐기하겠습니다.”
뚜껑을 여는 순간, 나는 거의 울먹이며 말했다.
“잠깐만요! 이거 동생이 몰래 저한테 선물한 건데… 맛이라도 보면 안 될까요?”
직원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 모금 드세요.”
나는 동생의 사랑을 느끼며 홍삼 농축액을 한 모금… 아니, 거의 반 병 이상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문득 머릿속 계산이 시작됐다.
“기내 허용이 100ml… 내가 600ml만 마시면 된다. 그래, 7분의 6만 마시면 돼.”
그 순간, 나는 스스로가 너무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눈을 질끈 감고 쓰디쓴 농축액을 마셔내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다 마시고 나서 직원에게 물었다.
“이제 이거 100ml 이하 된 거 같은데… 들고 들어가도 되죠?”
직원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요… 병이 700ml라서 안 돼요. 내용물이 줄어도 상관없습니다.”
그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뚝’ 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미국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내 뱃속은 홍삼 농축액과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설사와 위통이 번갈아 밀려왔고, 나는 기내식은 고사하고, 거의 죄수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건, 비행기가 랜딩 할 때 그 미친 속도로 활주로를 달리던 순간이다.
느슨하게 조인 안전벨트는 내 몸을 제대로 붙잡아주지 못했고,
내 위장은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외쳤다.
“지금이야!”
나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마지막 기운으로 입구를 틀어막았다.
그 싸움은… 지금도 생각만 하면 위장이 꿈틀거릴 만큼 치열했다.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비장하면서도 가장 한심했던 순간일 거다.
이제 나는 확실히 안다.
사람은 홍삼 농축액 600ml를 한 번에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을.
그렇게 스스로와의 싸움 끝에, 13시간 만에 마침내 미국에 도착했다.
표도 가장 저렴한 걸로 끊어서, 뉴욕도 아니고 텍사스의 댈러스 공항(DFW)에서 무려 14시간을 경유해야만
최종 목적지인 노스캐롤라이나에 닿을 수 있었다.
댈러스 공항에 내렸을 때, 긴장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지만 마음은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
돌이켜보면, 아마도 그건 속을 거의 다 비워낸 뒤였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비행기에서 내려, 사람들 틈에 섞여 입국심사장으로 향했다.
미국 시민권자들은 줄도 거의 서지 않은 채 금세 사라졌지만, 외국인 줄은 1시간 넘게 묵묵히 서서 기다려야 했다.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 이제 진짜 외국인으로 살아야 하는구나.”
입국 심사관 앞에 서서, 깊게 숨을 고르고 조용히 마주 섰다.
긴장 반, 안도 반의 표정으로 가방 속 서류를 꺼냈다.
학교 입학 서류 I-20, 학생 비자, 여권
한국 네이버 카페에서 ‘미국 입국 꿀팁’이라며 공유된 리스트 그대로였다.
심사관이 첫 질문을 던졌다.
“What is the purpose of your visit?” (방문 목적이 무엇인가요?)
그제야 현실감이 밀려왔다.
‘아, 여기가 진짜 미국이구나. 정신 바짝 차리고 대답해야 한다.’
나는 네이버 카페에서 연습했던 문장 그대로, 어설픈 영어로 대답했다.
그런데 문제는 심사관의 발음이었다.
토익 듣기 성우처럼 또박또박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았다.
첫음절부터 웅웅 뭉개지는 목소리, 묘하게 끌리는 억양.
지금 생각해 보면 텍사스 남부의 터프한 사투리였지만,
그때의 나는 그냥,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심사관은 몇 가지 질문을 더 했다.
나는 못 알아들으면 최대한 예의 바르게 다시 물어보고 대답했다.
그리고 마침내, 내 인생에 길이 남을 질문이 나왔다.
그 순간, 정말 이렇게 들렸다.
“What you dress?” (너 지금 뭐 입고 있어?)
눈앞이 번쩍하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역시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설마 옷 때문에? 세관에서 고급 의류 세금이라도 물리려는 건가?
홍삼 농축액 사건의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되살아났다.
하필 오늘은 미국 첫날이라고, 괜히 힘 좀 준다고,
악어가 크게 그려진 꽤 비싼 티셔츠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비행기 안내문에서 봤던 문구를 떠올렸다.
‘800달러 이하 개인 소지품은 세관 신고 면제.’
그래서 자신 있게 내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It is not too expensive.” (그렇게 비싸지 않아요.)
심사관의 표정이 굳더니,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리고 다시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What you dress?” (너 지금 뭐 입고 있어?)
나는 또박또박 대답했다.
“It is not too expensive.”
심사관은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종이에 뭔가를 적어 내게 내밀었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What is your address?” (당신의 주소는 무엇인가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 주소를 물은 거였구나.
노스캐롤라이나의 호텔 주소를 더듬더듬 말하자,
심사관은 말없이 도장을 찍어주었다.
나는 터덜터덜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말은 딱 하나였다.
“You suck.”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