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다섯, 그리고 나
비행기 창문 너머로 내려다본 노스캐롤라이나의 첫인상은 예상보다 훨씬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끝없이 이어진 평야 위로, 장난감처럼 작은 트랙터들이 느릿하게 움직이며 농작물을 돌보고 있었고, 곳곳에는 햇살을 머금은 건초 더미들이 평화롭게 놓여 있었다.
그 풍경은 낯설다기보단 이상하게 편안했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부드럽게 착륙하자, 나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진짜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이틀 동안 묵을 호텔에 전화를 걸어 픽업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막상 걸기 전에는 긴장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마음이 차분했다.
아마도 미리 준비해 둔 영어 대본 덕분이었을 것이다.
나는 핸드폰 메모장에서 영어 문장들을 마지막으로 다시 확인하고, 심호흡을 한 번 더 한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호텔 프런트 직원은 밝고 또렷한 목소리로 내 이름과 예약을 확인했고, 이어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물론 모든 문장을 완벽하게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단어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에서 조합해 보니 이런 뜻으로 들렸다.
“한 시간쯤 뒤에 셔틀버스가 공항에 도착할 예정이고, 도착하면 기사님이 지금 제가 전화드린 이 번호로 연락하셔서 어디로 오라고 알려주실 거예요.”
그 설명을 듣고 나니, 마음에 걸려 있던 작은 돌덩이가 스르르 치워지는 기분이었다.
입국심사도 무사히 끝났고, 인천공항에서부터 챙겨 온 서류며 짐들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수화물센터에서 다 찾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미리 상상했던 순서 그대로 일이 하나씩 착착 풀려나갔다.
몸은 여전히 뻐근하고 피곤했지만, 이상하게 마음만큼은 한결 산뜻했다.
그제야 조금 '이제 나도 미국 생활에 발을 디뎠구나'하는 기분이 처음으로 들었다.
슈트케이스 손잡이를 길게 뽑아 양손에 하나씩 끌며, 나는 노스캐롤라이나의 뜨거운 햇살 속으로 걸어 나왔다.
그 순간, 핸드폰에서 벨이 울렸다.
화면에 뜬 낯선 번호를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호텔에서 오는 기사님일 거라고 느꼈다.
“Hello, welcome to North Carolina. Are you Yooseok Kim?”
(안녕하세요, 노스캐롤라이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김유석 씨 맞으신가요?)
“Hi, yes, I’m Yooseok Kim. Where are you now?”
(안녕하세요, 네. 저는 김유석입니다. 지금 어디에 계세요?)
“Please come to Island Five.”
(5번 아일랜드로 와 주세요)
……Island Five?..섬?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섬 다섯 개 중 어디로 오라는 건가?'
'분명히 공항인데 왜 갑자기 섬 얘기를 하는 거지?'
당황스러운 마음에 다시 물었다.
“I’m sorry, did you say Island Five?” (죄송하지만, 5번 아일랜드라고 말씀하신 거 맞나요?)
기사님은 마치 내가 당연히 알아야 한다는 듯, 같은 말을 또렷하게 반복했다.
“Yes, Island Five.” (맞아요, 아일랜드 5번이에요)
'섬 다섯… 섬 다섯…'
"아니, 여기가 제주도야 뭐야."
나는 핸드폰을 귀에 댄 채로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눈앞에는 가족과 친구를 마중 나온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커다란 콘크리트 기둥들마다 숫자가 적혀 있었다. 그중 내가 서 있는 기둥에는 큼지막하게 2라고 쓰여 있었다.
‘설마 이 숫자가 Island 번호인가…?’
감으로라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았다.
“Okay, I’ll go there. Thank you.” (알겠어요, 그쪽으로 갈게요.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최대한 태연한 척 가방을 끌며 숫자 5 기둥 앞으로 걸어갔다.
조금 뿌듯하기도 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하얀색 세단과 검은 SUV 뿐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Hi, I’m at Number Five now. What color is your bus?”
(안녕하세요, 지금 5번 구역에 도착했어요. 버스 색깔이 뭐예요?)
“My bus is silver.”
(제 버스는 은색이에요)
은색? 여기엔 은색 차가 없는데?
이제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무언가… 몹시 잘못되었다는 것을.
“Are you here right now? I don’t see your bus.”
(지금 여기 계신가요? 버스가 안 보여요)
기사님은 답답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이번엔 숨도 안 쉬고 쏟아냈다.
“Island Five! Island Five!” (5번 아일랜드로 와! 5번 아일랜드!)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초조한 건지.
나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2층에서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 고가도로에 대기 중인 차들에 오르고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혹시 저기가 Island인가?
나는 무거운 가방을 질질 끌며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2층 기둥에도 숫자가 적혀 있었고, 다시 숫자 5 기둥을 찾았다.
그런데… 거기도 은색 버스는 없었다.
숨이 턱 막혔다.
나도 모르게 허탈하게 웃음이 났다.
그 순간 또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목소리에 더 이상 여유가 없었다.
“Hey! Yooseok! Where are you?! Come to Island Five! Island Five!”
(헤이! 유석! 어디야?! 5번 아일랜드로 와! 5번 아일랜드!)
말 끝마다 ‘Island Five’를 연타로 외치는 소리가 핸드폰을 뚫고 나올 기세였다.
순간, 나도 울컥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못 하고 겨우 내뱉었다.
“Okay… sorry… I’m coming…” (알겠어요… 미안해요… 지금 가고 있어요…)
그때 마침내 앞을 지나가던 보안 경찰 아저씨가 보였다.
나는 마지막 용기를 짜내며 말을 걸었다.
“Excuse me… Where is Island Five?” (실례합니다… 5번 아일랜드는 어디에 있나요?)
흑인 경찰 아저씨는 내 몰골을 한 번 훑어보더니, 하얀 이를 드러내며 피식 웃었다.
그 표정이 꼭 ‘오늘도 이런 놈 하나 봤네’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손짓으로 따라오라고 하더니, 아무 말 없이 앞서 걸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뒤를 쫓았다.
아까 내가 서 있던 곳을 지나, 긴 횡단보도를 건너자 경찰 아저씨가 멈췄다.
피식 웃으며 ‘이제 알았냐?’ 같은 눈빛으로 말하였다.
“Here. This is Island Five.” (여기예요. 여기가 5번 아일랜드예요)
눈앞에 은색 중형 밴이 있었다.
그제야 다리가 풀렸다.
기사님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마치 영화 대사처럼 숨도 안 쉬고 영어로 무언가를 빠르게 쏟아냈다.
나는 할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영어로 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엄두조차 나지 않아 포기하고 고개를 숙인 채 “Sorry, sorry…”만 연달아 되풀이했다.
그렇게 겨우 차에 올랐다.
숨을 고르고 핸드폰을 꺼내 ‘공항 Island’를 검색했다.
‘미국 공항에서는 도로 중앙에 있는 픽업존, 셔틀 정차 구역 등을 Island라고 부릅니다.’
그 짧은 문장을 보고 나서야, 방금 이 난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갑자기 혼자 중얼거렸다.
‘하… 나 지금 이틀째인데… 미국이랑 나, 서로 안 맞는 거 아닐까…’
그 순간, 운전석에서 기사님이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화내는 게 미안했는지, 장난 섞인 목소리로 말하였다.
“Welcome to America… Yooseok.” (유석, 미국에 온 걸 환영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한국어로 중얼거렸다.
“…아, 진짜 돌겠네..”
한참을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숨을 내쉰 뒤,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렇게, 내 미국 생활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