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낯선 땅 위에, 내 공간이 생겼다

나만의 공간, 나만의 시작

by 김세원

호텔에서 묵는 마지막 날이었다.

학교 홈페이지에서 추천한 학생 아파트를 직접 둘러보고, 마음에 들면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까지 하기로 한 날이었다. 한국에서 미리 예약해 둔 아파트 에이전트와의 미팅이 오전에 있었고, 오후엔 은행에도 들러 계좌를 만들 계획이었다.

일요일 날 교회에서 만난 형, 누나들이 조언해 준 것처럼, 미국 생활을 하려면 은행 계좌는 빨리 만드는 게 좋다고 했다. 장을 보거나 휴대폰 요금을 내고, 심지어 학비까지 모든 게 계좌 하나로 해결되니 미리 준비해두라는 얘기였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가슴속에 잔잔한 긴장감이 번졌다. 오늘은 ‘내가 미국에서 진짜 첫 발을 내딛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샤워를 마치고, 호텔 조식을 챙겨 먹으며 오늘 하루를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했다.

괜히 늦으면 안 될 것 같아 서둘러 나왔고,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건물 외관을 둘러보며 천천히 주변을 걸었다. 흰색과 회색이 섞인 단조로운 외벽, 군더더기 없는 직선 위주의 구조는 실용성에 집중한 듯 보였다. 미국 드라마에서 보던 기숙사 같기도 했지만, 어딘가 미국의 본연의 모습을 처음 마주한 느낌이었다. 아직 학기 시작 전이라 그런지,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고,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햇살만 은근하게 번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멀리서 한 백인 아주머니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크고 둥근 체격에 살짝 구부정한 어깨, 웃을 때 눈가에 잡히는 잔주름이 묘하게 신뢰감을 줬다. 에이전트와의 첫 만남은 생각보다 편안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우리는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나눴다.

"Hi, are you Yoo Seok?" (안녕하세요, 혹시 유석 씨 맞으세요?)

"Yes, nice to meet you." (네, 만나서 반가워요)

"Me too. You know, I’m Emily. I’m the leasing agent for this apartment!"

(저도 반가워요! 저는 에밀리예요. 이 아파트 임대 담당자예요!)

서로 웃으며 짧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미국에 올 때 별일 없었냐는 질문에, 나는 입국 심사관이 'address'라고 물었을 때 그 단어를 못 알아듣고 당황했던 이야기를 과장된 제스처와 함께 풀어내 웃음을 유도했다. 에밀리는 소리 내어 웃었고, 그 뒤로는 나를 배려하듯 평소보다 말 속도를 조금 늦추고, 쉬운 단어만 골라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 마음이 느껴져서 괜히 고마웠다.

본격적으로 에밀리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 아파트는 학교에서 직접 운영하는 기숙사와는 달리 민간 회사에서 관리하는 형태라고 했다. 즉, 학교 근처에 있긴 하지만 학교 소속은 아닌, 일종의 '학생용 민간 아파트'였다.

건물 외관은 멀리서 보면 단순하고 실용적인 구조였고, 벽면의 재질과 색감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가볍게 지어진 느낌을 줬다. 각 아파트 유닛은 2명에서 4명까지 함께 거주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모든 입주자에게 개인 방과 그 안의 개인 화장실이 제공된다는 점이었다. 방에는 침대, 책상, 옷장뿐 아니라 개인 욕실까지 딸려 있어, 완전히 독립된 공간이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거실과 주방은 오히려 룸메이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아파트 구조 자체에 함께 살되, 각자의 공간은 확실히 보장하는 미국인들의 생활 방식이 그대로 녹아 있는 듯했다. 나는 이 구조가 꽤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편리했던 건, 대부분의 가구와 가전이 기본 옵션이라는 점이었다. 소파, 식탁, 냉장고, 오븐, 전자레인지, 세탁기, 건조기까지 이사를 오면 짐만 들고 들어오면 되는 수준이었다. 한국에서라면 부모님과 함께 상점들을 돌며 하나하나 가구를 구입했겠지만, 여긴 시작부터 셋업이 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계약 방식도 다소 생소했다. 같이 사는 룸메이트들과 비용을 나누는 게 아니라, 내가 쓰는 방에 대해 내가 따로 계약하고, 따로 책임지는 방식이었다. 계약 기간도 학기 단위가 아닌 1년 단위였다.

처음엔 모든 게 조금 낯설었지만, 하나씩 설명을 듣다 보니 오히려 이쪽이 더 깔끔하고 명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구조 덕분에 룸메이트가 바뀌어도 내 계약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도 꽤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한국과 비교하면 월세는 확실히 높은 편이었지만, 그만큼 주거 수준도 높고 환경도 깔끔했다.

그날, 에밀리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미국에서의 첫 집이 될 수도 있는 이 공간을 마음속으로 여러 번 그려보았다. 무엇보다도 에밀리가 배려해서 쉬운 영어로 천천히 설명해 준 덕분에, 내가 대부분의 내용을 영어로 이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놀랍고 정말 기뻤다. 아직은 낯설지만, 나도 곧 이곳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미한 확신이 들었다.

에밀리는 여러 방을 보여주더니, 그중 하나를 특히 추천했다. 햇살이 잘 들고, 룸메이트 두 명 모두 깔끔하게 지내는 학생들이라는 설명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실제로 방에 들어서자, 남향이라 그런지 창문 틈새로 흘러들어온 햇살이 바닥에 부드럽게 번지고 있었다. 공기 자체도 맑고 환했으며, 방 안은 전체적으로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룸메이트들의 생활 흔적에서 느껴지는 성격이었다. 주방 위에 반듯하게 정돈된 각종 양념통들, 모서리에 반듯하게 접힌 담요, 오븐 손잡이엔 주름 하나 없이 고르게 접힌 키친타월이 걸려 있었다. 디테일 하나하나에서, 이들이 정리정돈을 생활화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한눈에 이 방이 마음에 들었다.

괜히 고민하는 척하며 에밀리와 함께 다른 방들도 둘러보았다.

같은 아파트 단지 안인데도, 집마다 분위기가 너무 달라 작은 문화 박물관을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어떤 방은 문을 여는 순간부터 강한 알코올 향이 훅 올라왔다.
거실 한가운데에는 맥주 공장에서나 볼 법한 은색 생맥주 탱크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고,
벽 쪽 선반에는 색색의 술병이 마치 전시품처럼 줄지어 놓여 있었다.
술잔도, 병따개도, 바틀 쿨러도 크기별로 정렬되어 있어
“여긴 아파트가 아니라 개인 펍 아니야?”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에밀리는 씩 웃으며 말했다.

“College boys. What can I say?”
(대학생 남자애들이죠, 뭐 더 말이 필요하나요?)

그 다음 집은 또 전혀 다른 세계였다.
문을 여는 순간 LED 조명이 알록달록하게 번쩍였고,
거실 전체가 게임 세트로 채워져 있었다.
삼면 모니터에, 레이싱 게임용 핸들 세트,
천장에 박힌 스피커, 벽면을 가득 채운 게임 피규어들까지.
좌우로 흔들리는 마사지 의자 위에서 누군가 방금 전까지 플레이했던 흔적이 느껴졌고,
바닥엔 에너지 드링크 캔이 반짝반짝 널려 있었다.

그 다음 집은 또 달랐다.
셀프 인테리어를 좋아하는 듯, 벽에는 직접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고, 주방 선반엔 홈카페 장비와 원두병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마치 미국판 감성 원룸 같았다.

집을 몇 개 더 둘러보며 같은 대학생이라는 말이 이렇게 다르게 펼쳐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한국에서는 보통 비슷한 분위기로 꾸며지곤 했는데, 여긴 진짜 제각각이었다.
개인의 취향과 성격이 집 구석구석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 장면들 사이를 걸으며 문득 생각했다.
‘아, 내가 이제 이런 다양한 삶들 한가운데로 들어가는구나.’
그 사실이 조금은 두렵고, 조금은 설레고, 묘하게 현실이 피부에 닿아오는 느낌이었다.

결국, 나는 에밀리가 추천한 2층 201호를 선택했다. 에밀리는 나보다 더 기뻐 보였다.

"This room is a great choice. It really suits you."

(이 방 진짜 잘 골랐어요. 너무 잘 어울린다)

계약은 바로 그 자리에서 진행됐다. 다행히 나는 한국에 있을 때부터 에밀리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보증금과 첫 달 월세를 현금으로 준비해 둔 상태였다. 보증금 550달러, 첫 달 월세 550달러. 총 1,100달러를 꺼내어 에밀리에게 건넸다. 에밀리는 차분하게 현금을 하나하나 세어보더니 “Perfect.”라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곧바로 영수증에 사인을 하고, 그것을 내게 건네주었다. 하지만 진짜 시작은 그다음부터였다.

계약서 외에도 각종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화재 보험 약관, 시설 이용 동의서, 세입자 수칙, 룸메이트 간 분쟁 시 대처 방안, 퇴실 전 청소 기준까지… 서류만 20장이 넘었다. 나는 눈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지만, 에밀리는 친절하게 하나하나 설명해 주며 사인을 유도했다.

“이건 네가 가전제품을 망가뜨리면 어떤 절차로 보상해야 하는지에 대한 거야.”

“이건 쓰레기 버리는 규칙.”

“이건 강아지 못 키운다는 서약서고… 키울 계획은 없지?”

에밀리의 말투는 무척 유쾌했고, 나는 피곤하면서도 웃음을 흘리며 서류마다 이름을 적고, 날짜를 쓰고, 사인을 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이제 정말 미국에서 산다는 게 시작되는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계약이 끝난 후, 에밀리는 마지막으로 방 열쇠를 건네주며 말했다.

"You're officially a resident now. Welcome!"

(이제 정식으로 이곳의 입주자가 되셨어요. 환영합니다!)

마치 어깨 위를 짓누르던 무게가 천천히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낯선 나라에서 처음으로 내 공간을 마련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스스로 큰일을 하나 해냈다는 성취감까지 밀려왔다.

그 순간, 내가 막 진짜 미국에서의 삶이라는 커다란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섰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것도, 누구의 도움도 아닌 내 힘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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