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날, 나는 은행까지 걸었다

은행 업무, 그리고 뿌듯한 시작

by 김세원

에밀리에게 좋은 방을 추천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한 뒤, 현관 입구까지 함께 걸어 나갔다. 문 앞에서 마지막까지 손을 흔들고, 문이 닫히는 순간 실내에는 고요한 정적이 번졌다.

룸메이트들은 아직 학기 시작 전이라 그런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 공간 안에는 사람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아기자기한 액자와 체크무늬 식탁보, 푹신한 소파 같은 소품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제 이곳이 내 집이구나.’라는 생각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익숙한 척 식탁에 한 번 앉아보고, 별 이유도 없이 냉장고 문을 열어 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내 방으로 들어왔다. 투박하지만 널찍한 책상 앞에 앉아 다음 일정인 은행 방문 계획을 세워보았다. 핸드폰을 켜고 Google Maps를 열었다.

가장 가까운 은행을 검색해 보니, 도보로는 58분, 차로는 15분, 버스로는 37분이 걸린다고 나왔다. 일단 우버 앱도 켜봤다. 가장 저렴한 요금이 29달러였다. 게다가 외곽 지역이라 그런지 기사가 잘 잡히지도 않았다.

‘29불이라니… 너무 아깝다.’ 그 말이 마음속에서 자꾸 울렸다.

다음 선택지는 버스였다. 요금은 2.20달러, 30분 간격으로 운행했다. 노선이 조금 복잡해 보였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데?’ 싶었다. 그러나 낯선 곳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기사에게 영어로 물어보는 상상을 하자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머리는 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마음은 아니었다. 그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냥 걸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몸은 조금 고되겠지만 마음은 그게 훨씬 편할 것 같았다. 날씨도 좋고, 오후 햇살도 부드러웠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 스무 곡쯤 들으면 도착하겠네."

스스로를 그렇게 설득하며 조용히 이어폰을 끼고 걷기로 결심했다.

계약을 마친 아파트에서 나와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중요한지 아닌지 따질 틈도 없이 모든 서류를 가방에 차곡차곡 넣었다. 어딘지 모르게 비장한 마음이 들어 점심도 평소보다 든든하게 먹었다. 마치 큰 여정을 앞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가방을 메고 신발끈을 한 번 더 조여 맸다. Google Maps가 안내하는 방향대로 콘크리트 보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햇살은 따갑게 쏟아졌지만 마음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낯선 길, 낯선 도시. 그럼에도 집 계약을 마쳤다는 성취감 덕분에 발걸음에는 묘한 자신감이 실려 있었다.

걷다 보니 공기 속 냄새가 자꾸 바뀌었다. 커피 향이 스쳤다가 다음 블록에서는 마리화나 냄새가 확 퍼졌고, 또 몇 걸음 옮기니 세제 향 같은 냄새가 섞여 나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길은 진하다…’라는 생각을 하며 각 블록마다 냄새를 판단하고 있었다. 미국 시골 골목의 냄새에는 어떤 규칙도 없었지만 묘하게 생동감이 있었다.

조용한 캠퍼스 길로 접어들자 이번엔 덤불 속에서 "사삭사삭!" 하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눈을 돌리니 다람쥐 한 마리가 잽싸게 도망갔다. 그런데 몇 초 뒤 또 다른 다람쥐가 나왔다. 처음엔 놀랐는데, 몇 분이 지나자 나무 뒤에 숨어 있다가 불쑥 튀어나오는 노루도 보고, 야생 토끼가 강아지보다 빠르게 뛰는 모습도 보았다. 신기하고 놀라웠지만, 어느새 익숙한 풍경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길 옆으로 차들이 엄청난 속도로 쌩쌩 달리고 있었다. 여기는 고속도로도 아닌데 왜 이렇게 빠른 걸까? 깜짝 놀라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트럭과 SUV가 지나갈 때마다 그들이 몰고 오는 거센 바람에 몸이 휘청했다. 넘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순간만 방심해도 차 앞으로 빨려들 것 같은 상상이 들며 등줄기에 식은땀이 타고 흘렀다.

걸음은 점점 느려졌고 어깨는 굳어갔다. 더운 날씨에 땀은 멈출 줄 몰랐고, 티셔츠는 이미 젖어 피부에 달라붙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던 음악도 이제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설레던 선율이 이젠 신경을 긁는 소음처럼 들렸다. 그래서 이어폰을 빼고 숨을 고르며 다시 걸었다.

블록을 세 개쯤 더 지나자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조용하던 주택가가 사라지고, 낡은 벽돌 건물과 퇴색된 간판들이 어지럽게 뒤섞인 거리였다. 햇살은 똑같이 뜨거웠지만 공기 냄새가 달라졌다. 커피 향 뒤에 묵직한 먼지 냄새가 따라붙었고, 그 뒤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쇠 냄새 같은 게 퍼져 있었다.

블록을 몇 개 더 지나자 Google Maps가 안내하는 파란 선은 갑자기 기차 굴다리 아래로 이어졌다. 화면만 보면 그저 지름길이었지만, 실제로 가까이 다가가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위에서는 오래된 화물열차가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고, 철제 바퀴가 레일을 긁으며 내는 금속성 마찰음이 굴다리 상판을 울렸다. 그 울림이 바닥까지 전달되어 내 발바닥에서도 진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굴다리는 길이로는 10미터 남짓이었지만, 입구에 다가서는 순간 그 길이 배로 늘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경로를 다시 검색하니, 이 굴다리를 지나지 않으면 무려 한 시간을 더 돌아가야 한다고 나왔다.
잠시 멈춰 섰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굴다리 쪽으로 옮겼다.

입구부터 이미 공기가 달랐다.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냄새 위에, 오래 방치된 젖은 천 냄새와 썩은 음식물 냄새가 겹겹이 씌워져 있었다. 그 사이로 약물 특유의 달큰하고 끈적한 냄새가 스며 있어, 한 번 들이마시면 목구멍이 미세하게 따끔했다.

굴다리 아래에는 텐트가 다섯 개 정도 이어져 있었고, 색깔도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어떤 건 캠핑용처럼 멀쩡했지만, 대부분은 찢어진 방수포 몇 장을 엮어 만든 집에 가까웠다.

바닥에는 반쯤 젖은 담요, 얼룩이 진 침낭, 정체를 알 수 없는 플라스틱 상자, 흙과 기름이 묻은 옷가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한 곳에서는 비닐봉지 속 물이 새어 나와 더러운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고, 그 위에는 파리가 여러 마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사람들도 곳곳에 있었다.
어떤 남자는 벽에 기대앉은 채 몸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고, 눈동자는 초점 없이 공중을 따라다니며 가끔 허공을 움켜쥐듯 손을 흔들었다.
또 다른 남자는 상의를 벗은 채 축 늘어진 팔을 끌며 걸어가고 있었는데, 걸음걸이가 너무 불규칙해서 마치 관절이 꺾일 듯 비틀거렸다. 입에서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흐물거리듯 흘러나왔다.

여자들도 있었다.
두 명의 여성은 텐트 앞에 쭈그려 앉아 있었는데, 머리는 떡진 채 어깨를 덮고 있었고, 옷은 거의 입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흐트러져 있었다.
첫 번째 여성은 탱크톱이 옆으로 흘러내려 가슴 대부분이 드러난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또 다른 여성은 반바지가 허벅지 끝까지 말려 올라가 속옷이 그대로 보였다.
그들의 표정은 멍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눈빛은 마치 의식이 반쯤 깨어 있는 상태처럼 흔들렸고, 피부는 햇볕과 먼지에 말라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일부러 얕게 호흡하며 굴다리 안으로 들어갔다.
기차가 머리 위에서 지나갈 때마다 먼지가 바람처럼 떨어져, 희뿌연 입자가 햇빛 사이로 흩어졌다.

굴다리의 중간쯤 왔을 때였다.

그때였다. 굴다리 오른쪽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외쳤다.

“Go back to China!!” (중국으로 돌아가라!!)

소리가 굴다리 안에서 울려 퍼지며 두세 번 더 증폭돼 들렸다.
순간 심장이 위로 치솟는 것처럼 뛰었고,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고개를 돌리지도 못한 채 발걸음이 반사적으로 빨라졌다. 거의 달리는 속도에 가까웠다.

그때 뒤쪽에서 몇몇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술 취한 사람 특유의 허탈한 웃음이 아니라,
누군가를 놀리며 비웃는 소리였다.

곧이어 금속 캔이 바닥에 튕겨 굴러오는 소리가 들렸다.
굴다리의 빈 공간을 따라 울리는 소리가 내 뒤통수를 때렸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를 보는 순간 시선이 엉키고, 그들을 자극할까 봐 두려웠다. 그저 온 신경을 발끝에 집중하며 빠르게 굴다리를 빠져나왔다.

바깥쪽의 밝은 햇빛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무릎이 살짝 풀리는 느낌이 났다.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붙잡고 있던 손을 갑자기 놓아버린 것처럼, 긴장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숨을 크게 들이쉬니 비로소 깨끗한 공기가 폐 속 깊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 공기의 선명함이 얼마나 낯설게 느껴졌는지, 그제야 방금 전 굴다리에서 얼마나 몸을 웅크리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터널을 벗어났음에도 한참 동안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손바닥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발걸음은 앞으로 나아갔지만, 마음은 굴다리 한가운데에 아직도 붙들린 채였다.
방금 지나온 10미터가, 지금까지 걸어온 40분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여긴… 진짜 여러 세계가 한 도시에 겹쳐 있구나.’
그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유튜브에서 보던 ‘미국의 빈부격차’라는 말이 숫자나 그래프가 아니라, 지금 내 눈앞에서 숨 쉬고 움직이는 사람들의 삶으로 다가왔다.
굴다리 안쪽의 그림자와 바깥의 밝은 햇빛이 너무나 극단적이어서, 그 대비가 한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햇살은 점점 기울고, 내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다.
땀은 마르지 않았지만, 조금씩 걸음이 다시 평온한 리듬을 찾아갔다.
예상보다 20분이나 더 걸려, 결국 1시간 10분 만에 은행에 도착했다.
건물 입구가 보였을 때, 정말이지 기뻤다.
목적지에 닿았다는 안도감, 이 먼 길을 걸어왔다는 작지만 확실한 뿌듯함이 가슴 한쪽에 찬물처럼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였다. 문 앞에 서는 순간 안도감과 긴장감이 묘하게 섞여 가슴을 눌렀다. ‘이제 진짜 시작이구나.’ 미국에서 처음 만드는 은행 계좌라는 사실이 갑자기 더 크게 느껴졌다. 은행 안으로 들어서자 에어컨 바람이 온몸을 식혔다.

티셔츠에 밴 땀 냄새와 축축한 감촉은 여전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살 것 같았다. 입구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부는 조용했고 몇몇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 직원이 다가와 친절한 미소로 말을 걸었다.

"Hello, How can I help you?"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나는 조심스럽게 준비해 온 서류를 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은 내 상황을 간단히 묻더니 회의실처럼 생긴 조용한 상담 공간으로 안내해 주었다.

직원이 돌아오기 전, 땀에 젖은 가방 속 서류를 다시 열어 빠진 게 없는지 재확인했다. 몇 분 뒤 그는 작은 생수병 두 개를 손에 들고 돌아왔다. 냉장고에서 막 꺼낸 듯 차가운 물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Oh, thank you so much…"라고 중얼거리며 받아 들었다.

작고 아담한 생수병이 한 손에 쏙 들어왔다. 목이 너무 말라 있었기에 거의 단숨에 다 마셔버렸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 내가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 그제야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본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You must've walked a long way today. Would you like another one?"
(오늘 많이 걸으셨겠어요. 물 하나 더 드릴까요?)

나는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직원은 재빨리 냉장고로 향해 두 번째 생수를 건네주었다.

"Thank you… really, thank you so much."
(감사합니다…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직원은 내 표정을 보며 잠시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땀으로 젖은 이마를 식히고 깊은 숨을 몇 번 고르자 조금씩 숨이 가라앉았다. 그는 내가 진정되는 걸 확인하곤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So, let's start when you're ready. What brings you in today?"
(그럼 준비되시면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어떤 일로 오셨나요?)

그 한마디가 이상할 만큼 따뜻하게 들렸다.

계좌 개설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내가 준비해 간 서류들도 문제없었고, 직원은 필요한 정보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차분히 설명했다. 몇 가지 서류에 사인을 하고, 주소와 학교 정보를 적은 뒤 직원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Your account is now active. This is your temporary debit card, and your permanent card will arrive in 7 to 10 business days."
(고객님의 계좌가 이제 활성화되었습니다. 이건 임시 체크카드고, 정식 카드는 영업일 기준 7~10일 이내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직원은 이어 금색 글씨로 내 이름이 새겨진 임시 카드와 은행 로고가 인쇄된 머그컵, 그리고 작은 우산을 건넸다. 나는 멋쩍은 웃음과 함께 "Thank you so much."를 연신 되뇌었다.

그 후 한국에서 들고 온 현금을 꺼내 방금 개설한 미국 계좌에 입금했다. 휴대폰으로 잔고를 확인하는 순간 화면에 숫자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단지 은행 계좌를 만든 것뿐인데도 어딘가에서 ‘해냈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성취감이 온몸을 감쌌다.

햇살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이제는 그 열기마저도 두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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