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Yes와 이해 사이
은행 직원의 배웅을 받으며 기분 좋게, 자신감 넘치는 발걸음으로 은행을 나섰다.
많은 일을 혼자 해냈다는 성취감 덕분인지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웠다.
지금 호텔로 바로 들어가기엔… 아쉬웠다. 이왕 나온 김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문득 핸드폰 약정 문제가 떠올랐다.
한 달짜리 선불 유심은 임시방편일 뿐. 어차피 정식 플랜으로 바꿔야 했다.
Google Maps에 찍힌 매장은 걸어서 10분.
“그래, 오늘은 그냥 다 해결해 버리자.”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몇 블록 지나지 않아, 거리는 갑자기 등급이 달라진 공간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 나타난 곳은 고급 와인샵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와인들은 단순히 비싼 술이 아니라, 거의 예술품처럼 스폿 조명을 받고 서 있었다. 가게에서 나오는 사람은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와인 두 병이 든 종이백을 한 손으로 들고,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로 걸어 나왔다. 그 두 병 가격이 내가 가진 가방 안의 모든 금액보다 클 것 같았다.
조금 더 가자, 거리 분위기가 또 업그레이드됐다.
이건 그냥 고급이 아니라 “돈이 많으면 이렇게 산다” 튜토리얼 영상 같은 느낌이었다.
먼저 내 시야를 사로잡은 건 롤스로이스의 과하게 부드러운 엔진음이었다. 문이 ‘뚝’ 하고 열리는 소리마저 고급스러웠다. 은색 벤틀리 컨티넨탈, 완전히 광택 처리된 상태라 주변 건물들이 차체에 찌그러진 거울처럼 비쳤다. 그리고 그 차 문이 열리는데 진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흰머리가 번쩍이는 할아버지가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그는 은회색 슈트를 입고 있었고, 양복 깃에는 작고 검은색 브로치가 박혀 있었다.
호흡 하나하나가 평생 동안 부자로 살아온 사람의 리듬이었다. 벨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문쪽으로 한 손을 자연스럽게 내어 보여 “Good afternoon, sir.” 하고 인사했다.
과하지 않은 동작인데도, 몸에 밴 전문성이 느껴졌다.
바로 그 옆에서, 차에서 내린 노인의 부인으로 보이는 여인이 강아지를 안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의 품에 안긴 작은 몰티즈는 사람 옷처럼 잘 재단된 코트를 입고 있었고, 목에는 내 옷값보다 비싸 보이는 장식이 달려 있었다. 여인은 개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은 채 주변을 둘러보며 걸었고, 그 모습마저 이 거리의 풍경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나는 땀에 젖은 티셔츠에 배낭 하나를 메고, 마치 다른 세계에 실수로 잠깐 발을 들인 사람처럼 그 사이를 걸었다. 명품 매장을 지나가다 입구 앞에서 잠깐 속도가 느려졌다. 유리문에는 지문 하나 없었고, 금속 손잡이는 과할 만큼 반듯하게 빛나고 있었다. 안쪽에서는 갈색과 금색이 정해진 간격으로 반복되고 있었고, 그 정돈된 분위기 자체가 이미 “여긴 아무나 들어오는 곳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괜히 자세를 고쳐 잡고 시선을 앞으로 둔 채 그대로 지나갔다.
불과 한두 시간 전만 해도, 나는 기차 굴다리 아래에서 약에 취한 사람들 사이를 뛰다시피 지나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욕설과 캔 굴러가는 소리, 눅눅한 냄새, 비틀거리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가득했는데, 지금 내 앞에 펼쳐진 건 그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고급 와인숍, 벤틀리, 호텔 벨보이, 향수 냄새….
같은 날, 같은 시에 일어나고 있는 풍경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 묘한 감정을 안고 조금 더 걸으니, 어느새 내가 찾던 핸드폰 매장이 눈앞에 나타났다.
유리문 너머 형광등 아래에는 반듯하게 진열된 최신 스마트폰과 충전기, 여러 색의 케이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계산대 뒤에는 직원 한 명이 정면을 바라본 채 앉아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문 위의 작은 방울이 맑게 울렸고,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땀에 젖은 팔과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가 눈을 맞추며 미소를 지었다. “Hi, how can I help you?”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나는 머릿속에서 문장과 단어들을 재빨리 조합해 말했다.
“Hi… I bought a prepaid SIM at the airport. I want to change it to a monthly plan.”
(안녕하세요… 공항에서 선불 심카드를 구입했는데요, 월 정액 요금제로 바꾸고 싶습니다.)
‘Bought’라는 과거형을 정확히 말한 나 자신이 순간 조금 대견했고, 아주 잠시지만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직원은 내 여권과 유심 정보를 확인한 뒤 통신사 로고가 있는 팸플릿을 꺼내 펼쳐 놓았다.
컬러풀한 요금제표 위로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며 각 요금제의 차이점과 혜택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친절했고, 말투도 부드러웠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나는 그의 설명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Data rollover… unlimited hotspot… activation fee waived…”
(데이터 이월 가능… 핫스팟 무제한 제공… 가입비 면제…)
익숙하지 않은 단어와 전문 용어가 쏟아져 나왔다.
몇 번을 다시 물어보고 “Pardon?”을 반복해도, 설명은 여전히 외계어처럼 들렸다.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직원의 말은 배경 소음처럼 흐려졌고, 매장 음악과 다른 손님들의 잡담과 섞여 하나의 소음으로만 들렸다.
방금 전까지 느꼈던 자신감은 금방 사라졌다.
내가 잠시 잊고 있었던 긴장감과 막막함이 서서히 되살아났다.
가슴이 답답해져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정신을 모았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선불 유심을 monthly plan(월간 요금제)으로 바꾸는 것.
어떤 조건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아까 해낸 계약들과 은행 업무를 떠올리며 조금 더 용기를 냈다.
요금제표를 훑어보며 ‘Monthly’라고 적힌 줄에서 중간 가격대의 칸을 조심스럽게 가리켰다.
“I want this plan.” (이 요금제로 하고 싶습니다.)
직원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태블릿을 꺼내 질문을 빠르게 쏟아냈다.
나는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괜히 아는 척하며 “Yes,” “That’s good,” “Sure”를 자동반사처럼 반복했다.
조급해졌고, 이 상황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몇 분 뒤, 직원은 태블릿을 닫으며 활짝 웃었다.
“All set! Your plan starts today.”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오늘부터 바로 이용하실 수 있어요.)
그는 카드 단말기를 밀어 놓았고, 프린터에서 나온 영수증을 건넸다.
나는 막 발급받은 임시 카드를 꺼내 결제했다.
서명란에 사인한 뒤 영수증을 내려다본 순간, 심장이 살짝 내려앉았다.
“$99.00”
‘잠깐… 뭐라고?’
내가 고른 건 25달러 요금제였다. 그런데 왜 99달러?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영수증을 들어 직원에게 보이며 소리쳤다.
“Something wrong… something wrong!”
(문제 있어요! 뭔가 잘못됐어요!)
목소리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크게 났고, 직원도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What’s wrong?” (무슨 문제인가요?)
하지만 나는 입을 떼지 못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머릿속 단어들이 한꺼번에 엉켜버렸다.
영어는 다시 낯선 외국어가 되었고, 직원의 말도, 내 말도 허공에서 미끄러지는 느낌이었다.
뭔가 설명을 하고 싶은데, 입에서는 “something…”만 맴돌았다.
그때 문득 교회에서 만났던 제이슨 형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전화를 걸었고, 형은 상황을 듣자마자 아주 평범한 일처럼 말했다.
“어, 거기? 우리 지금 근처야. 한… 10분이면 갈 듯?”
너무 자연스러운 말투였다. 정말로 “거기 매장? 걱정하지마”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 짧은 한마디가, 이상하게도 나를 순식간에 진정시켰다.
정말 10분쯤 지나자 형이 문을 열고 들어왔고, 두 명의 형들이 마치 팀 미션이라도 하듯 뒤따라 들어왔다.
그들이 매장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분위기가 약간 달라졌다.
내가 막 빠져 죽던 영어의 늪이, 형들한테는 그냥 무릎 정도 깊이인 것처럼 느껴졌다.
상황 설명은 순식간이었다.
직원과 형들 사이에서 영어가 빠르게 오갔고, 나는 그걸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아… 나도 저기서 한 줄이라도 끼워 넣고 싶은데…"
조금 후, 제이슨 형이 돌아서며 나에게 쉽게 설명해 줬다.
“너 25달러 플랜 고른 건 맞아. 근데 옵션 설명할 때 계속 Yes만 했지?”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형들은 피식 웃었고 나는 그 웃음만으로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
자책감이 올라오자, 형은 자신이 예전에 핸드폰 약정 잘못 들어서 인터넷 5GB 쓰는데 150달러 냈던 흑역사를 꺼내며 나를 웃게 해주었다.
옆의 다른 형도 “나도 처음엔 다 그랬어~”라며 맞장구쳤다.
그 말에 마음이 스르르 풀리는 게 느껴졌다.
형들은 학생 할인까지 적용해서 플랜을 20달러로 다시 설정해 줬고, 직원은 결제된 99달러는 2~3일 안에 환불될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푹 앉아버렸다.
내 몸이 나보다 먼저 안도하고 있었다.
마음 한켠에는 처음으로 ‘나는 이 낯선 나라에서 참 작고 부족한 사람이구나…’ 하는 씁쓸한 감정이 스며들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래도… 나를 구해줄 사람은 있네.’ 그 사실이 조금은 웃기고, 조금은 고마웠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다음에는 조금 덜 당황하고, 조금 더 천천히, 그리고 무엇보다 옵션 설명 앞에서는 무조건 “Yes”라고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미국에서 사는 법을 아주 조금 배워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