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낯선 공항, 처음 어른이 된 기분을 느끼다.

어제보다 단단한 오늘

by 김세원

공항 카펫 위에서, 꿈조차 꾸지 못할 만큼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때였다. 갑작스레 공항 안내 방송이 다급한 목소리로 울려 퍼졌다.
“Dear passengers, this is the boarding call for flight KE092 to Los Angeles…”
(승객 여러분, LA행 KE092 편의 탑승 안내 방송입니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소리와 함께 눈이 번쩍 떠졌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뒤통수가 의자 밑 철판에 ‘쿵’ 하고 부딪혔다.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웅크린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얼얼한 통증이 조금 가라앉고서야 정신이 돌아왔고, 그제야 내 몸 절반이 의자 밑에 끼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이 자세로 잤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갔다.
몸을 빼내려다 또 팔꿈치를 의자 다리에 ‘탁’ 부딪혔다.
그제야 주변 사람들의 다리 사이로 나를 힐끗 보는 시선들이 들어왔다.
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느릿하게 일어나 머리를 쓸어 넘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처럼 의자 밑이나 창가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후드 모자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하나둘 눈을 뜨고 있었다. 멀리서 도넛 가게와 햄버거 가게, 커피숍들이 차례로 셔터를 올리며아침의 첫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일정을 확인하느라 분주했다.

막 문을 연 가게 앞엔 커피와 샌드위치를 사려는 줄이 금세 길게 늘어섰다.

고소한 커피 향 사이로 갓 구워진 베이컨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왠지 모르게 그 평화롭고 차분한 공항의 공기가 몸 어딘가에 남은 피로를 조금은 덜어주는 듯했다.

나도 저 커피를 한 잔 마시며 하루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다리에 힘이 빠지며 시야가 순식간에 흐려졌다. 입을 열어보려 했지만, 얇은 숨소리만 새어 나왔다.

“하아… 으윽…” 그제야 알았다.

이건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 몸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몸살이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싶었다. 그런데 이 낯선 공항에서 내 몸을 지켜줄 사람은 결국 나뿐이라는 사실이 스쳤고, 그 생각이 어깨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조금이라도 몸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마음에, 휘청거리는 다리를 붙잡듯 힘겹게 걸음을 옮겨 따뜻한 커피 향이 퍼지는 도넛 가게 줄에 섰다.

잠시 다른 사람들의 주문을 흘려들으며 헤이즐넛 커피 하나를 주문했고, 따뜻한 종이컵을 받아 테이블 한쪽에 조용히 앉았다. 커피가 목을 타고 천천히 내려가자, 온몸을 짓누르던 피로와 간질거리던 목이 조금씩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정말 맛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 처지가 이 커피를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느끼게 만드는 건지…’ 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멀리서, 수많은 공항 냄새 속에 은은하게 익숙한 라면 향이 섞였다.
고춧가루와 마늘 스프, 매운 기름 향이 공항의 아침 공기를 뚫고 코끝을 찔렀다.
매캐하면서도 고소한 그 냄새는, 딱 한국 편의점 문을 열었을 때 코를 감싸는 향 그대로였다.

그때 맞은편 테이블에 앉은 한국인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 앞에는 한자로 매울 ‘辛’ 자가 큼직하게 쓰인 컵라면이 놓여 있었다.
뚜껑이 살짝 열리자, 뜨거운 김 사이로 매운 고춧가루 냄새와 마늘 향이 퍼져 나왔다.

나는 침이 고인 채, 나도 모르게 입을 반쯤 벌린 채 멍하니 젓가락으로 면을 휘젓는 장면을 바라봤다. 그러다 입가에 흐른 침을 손등으로 닦고, 자린고비처럼 내 앞의 커피를 라면 국물이라 믿고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그 순간 뜨거운 열이 몸속 깊이 퍼져 나오는 것 같았다.
짧은 착각이었지만, 분명 커피에서 라면 맛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냄새는 한참 동안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 한국 라면은 현대 의학의 어떤 해열제보다도 효과가 확실했다. 그것도, 단지 냄새로만 말이다.
그러다 문득, 현지 시간을 확인하지도 않았고 부모님께 연락드리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야 ‘아, 로밍부터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전광판에 표시된 현지 시간은 오전 6시 27분.
이륙 시간과 게이트 번호를 메모하고 로밍 부스로 향했다.

통신사 직원은 밝게 미소 지으며 내 국적을 물었고, 곧 한국어 안내 책자를 건넸다.
그 순간, 낯선 땅에서 마주한 한글이 괜히 반가웠다.

나는 65달러짜리 선불 USIM(유심)을 골랐다.
직원이 “Good choice.”(좋은 선택이에요.)라고 말하자, 나도 모르게 웃으며 새 유심을 끼웠다.

핸드폰을 켜자마자 현지 시간이 뜨며 수십 개의 카톡과 이메일 알림이 한꺼번에 울렸다.
친구와 가족의 메시지, 학교 안내 메일, 그리고 학생 아파트 에이전트의 예약 확인 메일까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핸드폰 하나 개통했을 뿐인데 이렇게 든든하고 기쁠 수가 없었다.

많은 알림 중에서도 부모님 카톡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문자 내용을 읽기도 전에 손가락이 보이스톡 버튼으로 향했다.

버튼을 누르는 순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울컥함이 목 깊숙이 차올랐다.
눈물이 한 방울, 핸드폰 화면 위로 떨어졌다.

이 상태로 전화를 받으면 부모님이 더 놀라실 것 같았다.
억지로라도 평온한 척해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밝게 만들기 위해, 작은 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기쁜 생각, 웃긴 생각…’
스스로 되뇌며 다시 보이스톡 버튼을 눌렀다.

익숙한 통화 연결음이 몇 초쯤 이어지고, 곧 오랜만에 듣는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유석아, 잘 도착했어? 어떻게 연락이 하나도 안 돼?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밥은 먹었어?”

그 순간, 목구멍이 뜨겁게 막혔다.
대답하면 울 것 같았다.
숨만 삼키며 3초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공백이 길어질까 봐, 억지로 웃는 목소리를 꺼냈다.
“여보세요? 엄마, 아빠, 내 말 들려?”

“응, 잘 들린다. 별일 없.…”
엄마의 목소리가 잠깐 떨렸고, 그 뒤로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침묵 속에서 공항의 소음, 사람들의 발소리, 그리고 먼 곳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숨소리와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거짓말처럼 평범한 목소리를 꺼냈다.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와이파이를 못 찾아서 조금 헤매다가… 여기 식당이 진짜 많더라. 맛있는 거 먹느라 정신이 없었어. 인터넷 연결하려다 실패해서 연락이 늦었어.”

스스로 들어도 어색한 변명이었지만, 엄마는 더 묻지 않으셨다.
아니면, 이미 다 아시면서 모른 척해주신 걸지도 몰랐다.
그 뒤로는 비행기 시간 이야기, 집 계약 이야기, 앞으로 해야 할 일들 같은 평범한 대화를 이어갔다.
엄마는 중간중간 “그래, 다행이다…” ,“조심해서 가라…”, “몸 아프지 말고 잘 먹어야 돼…”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셨다.
그 목소리를 듣는 동안 눈물이 다시 차올랐지만, 울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 목소리를 오래 듣고 싶었다.

20분쯤 통화를 이어가자 마음이 조금 놓였다.

부모님을 안심시킨 듯해, 나 스스로도 괜히 대견했다.

전화를 끊고 문득 생각했다.

‘나도 이제, 조금은 철이 든 걸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커피는 차가웠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따뜻했다.

전화기를 내려놓자, 맛있는 아침이 간절히 생각났다.
가볍게 숨을 고르고 식당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화려한 식당 간판들과 메뉴판에 음식 가격이 눈에 들어오자, 다시 부모님 생각이 났다.
유학 보내려고 아끼고 모은 돈으로 내가 여기 서 있다는 사실이 가슴 어딘가를 눌렀다.

‘한 번쯤은 비싼 걸 먹어도 괜찮잖아.’

스스로 그렇게 말하며 식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왠지 미안하고 서러워서, 고개를 떨군 채 편의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7.99달러짜리 샌드위치 하나를 집어 들고, 계산대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여기서 제일 저렴한 음식이 한국 돈으로도 만 원이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스스로를 몇 번이나 달래고서야
주머니 속에서 구겨진 10달러짜리 지폐를 꺼냈다.

비행기가 잘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조심스럽게 샌드위치 포장을 뜯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결심이나 위로라도 되는 것처럼 첫 입을 천천히 베어 물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배가 고프고 긴장이 다 풀린 상황에서도 샌드위치는 정말 맛이 없었다.
퍽퍽한 빵은 한 입 먹을 때마다 빵가루를 폭죽처럼 사방에 흩뿌렸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역시 한국 편의점 음식이 진짜 고퀄이야. 이 돈이면 삼각김밥에, 아까 본 컵라면에, 디저트까지 풀코스인데.”
그래도 그 퍽퍽한 샌드위치조차 지금 이 순간엔 이상하게 고마웠다.

친구들 카톡 알림이 잇따라 울렸다. 익숙한 소리가, 이상하게도 나를 위로하는 듯하면서도 응원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비록 몸은 아프고, 낯선 곳에 있다는 생각에 걱정이 되었지만, 부모님을 안심시키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하나 작은 계획을 세워 나가는 내 자신이 조금은 성장한 기분이 들었다.

그 후로는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그 익숙한 일상 덕분인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목적지인 노스캐롤라이나로 향하는 비행기 시간이 다가왔다.

이번에는 어제와 달랐다.
조금은 단단해진 마음으로, 어제보다 덜 흔들리는 발걸음으로 게이트를 향해 걸었다.
창밖의 아침 햇살이 어깨 위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같은 공항이지만, 그 아침빛을 맞는 내 마음은 분명 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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