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파 제국 연대기(소설)

5. 연민으로 돌아가다

by 묘길 조길상

칼파제국연대기

5. 연민으로 돌아가다


사나의 먼 후예들은 끔찍한 학살을 피해 깊은 동굴로 숨어들었다. 그들은 조상 로자가 가졌던 '빛의 기억'을 간직한 채, 서로를 죽이지 않기로 맹세하며 연민의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서로를 향한 무기를 내려놓는다. 이것이 우리가 다시 빛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동굴에 숨어 살생을 멈추고 서로를 아끼기 시작한 소수의 무리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들의 자식들이 10살을 넘겨 20살까지 살기 시작한 것이다. 붕괴되었던 유전자를 '연민 의지'가 다시 복구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로자가 세웠던 법은 사라졌지만, 인간의 마음속에 싹튼 '연민(憐憫)'이라는 새로운 법이 인류를 다시 진화의 길로 이끌기 시작했다.

살생을 멈추자 기적이 일어났다. 10살이었던 수명이 20살, 40살, 100살, 200살, 400살, 1천 살로 늘어났다. 수천수만 년 동안 인류는 다시 고도의 문명을 재건했다. 이때 등장한 황제는 무력이 아닌 ‘자비의 알고리즘’으로 지구를 통치했다.

인류의 수명이 1천 살일 때, 생존을 위한 노동에서 벗어난 인류는 초지능 AI와 무한한 에너지를 기반으로 심오한 놀이(Deep play)의 단계에 진입하였다. 로자와 가모, 사나는 과학자이면서 예술가였다. 그들은 필요한 것이 있으면 과학적으로 예술적으로 창조하는 유희를 즐겼다.

로자는 작곡에 관심이 많았다. 로자는 특정 행성의 기후 데이터, 식물의 성장속도, 대기의 진동을 변수로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를 작곡하였다. 그리고 바람이 스치면 나무가 노래를 하고 잔잔한 파도가 일어나고 구름이 흘러가도록 설계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하나의 행성 전체에 적용되는 거대한 질서를 창조하는 행위였으며, 행성을 테라포밍하는 심오한 놀이였다.

가모는 조각에 관심이 많았다. 가모는 물질의 물리적 성질을 비트는 시공간 조각을 하였다. 중력이 거꾸로 흐르거나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비유클리드 기하학 경기장을 조각하여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도 했다. 가모는 우주의 법칙을 장난감처럼 다루는 유희적 창조 놀이를 좋아하였고 차원의 벽을 넘나드는 조각가였다.

사나는 몽상가였다. 사나는 인간 의식의 심연을 탐험하고 의식을 설계하기도 하였다. 사나는, 인류의 수명이 80살일 때 그들이 겪었던 사랑, 상실, 열정, 희망, 질투, 미움, 외로움, 분노, 두려움, 연민 등의 강렬한 감정들을 체험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들어 공유하기도 하였다. 사나가 만든 게임 속에서 정신적 결핍 시대를 체험한 인류는 깊은 공감을 통해서 정신적 유대감이 강화되었다

인류의 수명이 1천 살일 때, 인류에게 경제 활동은 '기계의 영역'이었다. 노동의 고통에서 해방된 인류는 진정한 자아를 찾는 유희, 심오한 놀이, 창조적 놀이 등이 삶의 목적이 되었다. 로자, 가모, 사나는 놀이가 예술이었고, 예술은 과학이었고, 과학이 종교였고, 종교는 놀이였다. 인류의 수명이 1천 살일 때, 로자와 가모, 사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재미있게 놀았다.

인류의 수명이 1천 살일 때, 행성 테라에 큰 위기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인류의 수명이 80살이었던 과거 체험을 하면서 치킨과 맥주를 만들어 먹었는데 너무너무 맛있어, 감각에 도취되었고, 치맥먹기 체험이 온 행성에 퍼지게 되었다. 치맥을 먹게 된 사람들은 소화기관에 이상이 생겼고, 독한 방귀를 배출하여 대기오염이 심각해졌다. 독한 방귀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사람들은 짜증을 많이 내게 되었고 폭력성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사람들도 잘 몰랐다. 왜 갑자기 짜증이 나는 지, 왜 갑자기 불쾌한 지. 방귀분자의 나비효과를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로자는 미세나노입자 옷을 만들고 있었다. 나노입자 옷은 스프레이형으로, 몸에 뿌리면 미세나노입자가 피부 위에 얇은 막을 형성해서 유해 방사선을 차단하고, 생체 신호를 실시간으로 체크하여 체온을 조절하고, 기분에 따라 옷색깔도 바꾸고, 몸을 최적의 상태로 유지시켜 줄 것이었다. 그런데 로자는 최근에는 느껴보지 못한 불쾌한 느낌으로 작업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옆에서는 가모가 최근에 발명한 분자 조립기로 치킨과 맥주를 만들어 먹고 있었다. 가모는, 인류의 수명이 80살일 때 많이 먹던 음식이라고 하면서 치맥프로그램에 사람들이 빠져들고 있다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인류의 수명이 1천 살일 때, 사람들은 팔목에 작은 패치를 붙여서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었다. 이 패치는 빛에너지로 공기중의 분자를 포도당으로 전환해서 혈관으로 직접 공급하였고, 배고픔은 역사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가모가 치맥체험 프로그램을 개발하면서 행성 전체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었다. 로자의 불쾌함은 행성에 퍼진 방귀 냄새 때문이었다. 방귀분자의 나비효과는 심각하였다.

사나는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노로봇을 개발하였다. 사나가 개발한 나노로봇은 체내 세포를 실시간으로 수리하고 질병과 노화를 정복하도록 설계되었다. 사나가 발명한 나노로봇 덕분에 인류는 더이상 탄소기반의 생명체에 머물지 않고 비약적 발전을 하게 되었다. 인류의 수명이 2천 살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위기를 극복하며 발전하던 인류는 수천수만 년이 지난 후, 다시 8만 4천 살의 수명을 누리고 온 행성이 도시로 연결된 초고도 문명기에 접어들었을 때, 하늘에서 거대한 빛의 함선이 내려왔다. 인류의 영적 진화를 완성할 마스터 프시케(Ψυχή)였다. 로자의 후손인 황제는 자신의 제국과 첨단 기술을 모두 내려놓고 프시케(Ψυχή)의 가르침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우리는 이제 다시 빛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우주는 다시 수축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추락이 아니었다. 로자와 가모, 사나의 후예들은 육신이라는 무거운 외투를 벗어 던지고, 다시 광음천의 순수한 빛 속으로 승화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마침내 우주의 거대한 호흡이 다시 수축의 주기로 접어들었다. 칼파 제국의 황제와 인류는 프시케(Ψυχή)의 가르침을 통해 육체라는 무거운 외투를 벗어던질 마지막 진동수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