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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예정 Jan 10. 2024

'간이역' 역사 교사가 사랑하는 문장들 #14

“인간은 인간 자신의 목적이다. 그의 하나밖에 없는 목적이다” - 카뮈

 "선생님, 상담을 받고 싶은데 시간 괜찮으세요?"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넘어갈 무렵 담임을 맡은 반 학생이 조심스럽게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평소에 장난스럽기는 하지만 진지한 편인 그 친구와 평소에 대화를 자주 나누는 편이긴 했지요. 자신의 꿈과 진로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장난 섞인 농담을 주고 받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직접적으로 상담을 요청한 적은 처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 선생님이랑 이야기 한 번 해볼까?" 


  학생은 보다 조용하거나 단 둘이 있을 만한 공간을 찾지 않고 그저 선생님과의 대화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복도에 놓인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학생의 요구대로 나란히 앉아서 같은 곳을 응시하며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했습니다. 자리에 앉은지 시간이 조금 지나니 학생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선생님, 제가 요즘 화가 너무 많아져서 고민이에요. 친구들이 평소에 치던 장난을 항상 웃으면서 넘기곤 했는데 요즘은 화부터 나요. 애써 올라오는 화를 누르긴 하지만 친구들에게 제가 화가 난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밤에 잠을 자려고 누우면 계속 친구들의 농담이 떠오르고 화가 났지만 참고만 있던 제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져요. 때로는 친구들에게 솔직한 감정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 순간뿐인 것 같고요. 진짜 저를 찾기가 너무 어려워요." 

  학생의 고민은 생각보다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이야기였습니다. 친구들과의 관계가 두루 원만한 편이고 항상 밝게 친구들을 대하는 학생이었으며 그 누구와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친구였지요. 그래서인가 이 친구의 이야기가 더 제 가슴을 후벼 팠는지 모르겠습니다. 담임으로서 학생이 겪고 있을 만한 고민에 대해 먼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것을 탓하기도 하면서요. 개인적인 반성이 길어지기 전에 학생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의 언어와 말로 표현하기를 계속해서 기다렸습니다. 


  "제가 언제부턴가 진정한 제 자신이 아니라 '페르소나'에 갇혀서 남들에게 보여지는 대로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이 생겼어요. 가볍게 주고 받을 수 있는 농담이지만 쌓아놓고 풀 시간과 기회는 갖지 못한 채 저만 너무 참고 있는 거 같아 화가 많아진 게 아닌가 싶어요. 그렇다고 친구들과의 관계를 생각하자니 솔직하게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아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자기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마치고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 학생에게 널리 알려진 진부한 해답을 주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교사가 학생의 고민에 대한 솔루션을 기계적으로 내뱉는다면 더이상 선생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도 한몫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진정한 자신'을 찾고 싶다는 이야기란 자기 존재에 대한 인정과 관심, 경험을 통해 배워가는 번뇌의 반복이 그만큼 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조심스럽게 답을 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이 같은 저의 생각을 학생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동안 혼자 고민하고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느라 정말 힘들었겠구나. 음... 사실 네가 갖고 있는 그 고민은 선생님도 마찬가지로 하고 있는 중이야. 선생님도 같은 교무실을 쓰는 선생님들, 또는 학생들이 던지는 말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애써 쿨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을 많이 하고는 해. 성격 탓인지 밤에 자려고 누우면 계속 생각이 나고 그 의미를 생각하려 하다가 불편한 마음을 안고 자기를 반복하기도 해. 그러다 어느 날에는 나에게 상처를 주는 이들에게 솔직하게 기분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그들은 끝까지 모르고 지나갈 것만 같더라? 그래서 연습을 하기 시작했어. 조금씩.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나 혼자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음 조금 상처가 되네요.' 또는 방송인 김숙 씨가 방송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상처주네?'라고 이야기하면서 진짜 내 감정과 기분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어.  처음에는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것 때문에 목소리가 떨리기도 했어. 그래서 시간을 두고 내게 상처를 준 사람과 단 둘이 있거나 개인적으로 만나 대화할 일이 생기면 그때야 속 이야기를 했지. 선생님도 참 문제라면 문제가 많아. 내게 상처를 주는 말을 들은 그 자리, 그 순간에 말을 하면 상대가 무안할 걸 걱정한 거야. 그래서 시간을 좀 두고 이야기하는 연습을 해보게 된 거지. 그런 시간이 조금씩 쌓이니까 상대방은 나에게 상처 주는 말을 덜 하거나 하지 않게 되었고 선생님도 부정적인 기분과 감정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어. 선생님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문제 때문에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좋지 않은 생각들로 가득한 시간을 보냈지. 나를 잃어가는 기분,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놓치고 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그것들을 되찾겠다는 의지도 꺾여서 말라 죽어가는 것 같은 기분? 그 기분 속에서 살다보니 진정한 나를 잃어가고 있다는 걸 알겠더라고." 


  "선생님도 그런 시기가 있었군요. 한동안 힘들어하시는 거 같아 보이긴 했어요." 


  "그럼. 선생님도 학생들 앞에서 항상 슈퍼맨인 것처럼 살려고 노력은 하지만... 그렇게 티가 났어?" 


  "아뇨. 그냥 선생님 얼굴이 슬퍼보이는 날들에는 '힘드신 일이 있나보다'했어요." 


  "(웃음) 티가 나긴 났구나.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결국은 내 감정, 내 기분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더라고. 친구들의 말에 상처를 받았다면 그 자리, 그 순간에 이야기를 하는 거야. 나도 너희랑 같이 웃고 싶은데 사실 웃음은 안 나온다고. 오늘 밤에 자기 전에 상처 받았다고 일기 쓰고 잘 거라고. 그 자리에서 말하기 어려우면 따로 이야기할 시간이나 기회를 잡아서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거야. 처음은 어렵지만 조금씩 반복하다보면 상대방은 무안하지만 미안해지고 너를 대하는 태도와 네게 전하는 말들이 조금씩 달라진다는 걸 느낄 거야. 무엇보다 네 말대로 '페르소나'에 갇히지 않아도 되는 거지. 나는 나고, 너는 너야.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만드는 건 상대방이 아니라 어쩌면 네 자신일지도 몰라." 

  학생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씩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르다 보니 생긴 자신감 하락과 자존감의 동요, 자신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그 기분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면서요. 친구들도 무안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솔직한 표현을 고민해보고 싶어졌다면서요. 저는 선생님으로서 제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한 게 아닌가 싶어 걱정스러웠지만 그 학생은 만족한 듯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시간이 지나 학생은 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선생님과 진솔하게 대화할 수 있어 기뻤고 자기도 조금씩 연습 중이라고요. 부정적인 기분으로부터 벗어나 '페르소나'에서 벗어나는 시간을 보내보고 있다면서요.  


  때로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여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자기 안을 들여다보고 쓰다듬어주거나 상처를 주는 것으로부터 거리두기를 하며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방법을 찾아야 하죠. 학생들보다 더 어른스러워야 할 교사이지만 여전히 쉽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학생으로부터 교사는 다시 배우고 일어날 힘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다짐합니다. 나를 잃어버리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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