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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 역사 교사가 사랑하는 문장들 #22

"역사가는 그것(지나가버린 것)에 주제를 맡긴다." - 발터 벤야민

by 박예정

2024년 갑진년의 해를 보내면서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올해는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말그대로 '다사다난'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다사다난'이라는 말에 담긴 깊이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와 시간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갈수록 기억에서 멀어지는 작은 일들이 더 많아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해를 마무리할 때면, '지나가버린 것'들에 대해 떠올릴 때면, 내 머리와 가슴에 남은 굵직한 기억들만으로도 참 여러가지로 기뻤구나, 즐거웠구나, 힘들었구나, 애썼구나 등 여러 감정을 떠올리게 됩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처럼 내 안에 이렇게나 많은 감정들이 있었나 싶다가도 이내 그 많은 감정들을 표현할 말들을 찾지 못해 짧은 고민만 하고 말았던 시간들이 쌓여 어느새 연말을 맞이했습니다.


역사학도이자 역사교사로서 2024년의 마지막은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주제들이 참 많았습니다. 아직은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한 '지나가버린 것'에 해당되지 않겠지만, 현재 진행형으로 기록 중인 일련의 사건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역사교사라면 즉각적으로, 또는 점차적으로 스스로의 입장과 생각, 현시점에서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봐야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이들과의 일상적인 대화와 수업에서도 그 고민의 흔적을 남긴 말들을 해야 했고, 혹시 주워담아야 할 표현들은 없었는지 되새겨야만 했습니다. 항상 느껴왔던 '말'의 무게와 다르게 유난히 그 무게가 피부로 느껴지는 연말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여러 인물과 사건, 살면서 깊이 찾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개념들이 역사화되면서 기록으로 박제가 되어가는 중에 '나'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여느 해와 다르게 더 깊이 가슴 속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살면서 으레 해야 하고 해왔던 고민과는 다른 색깔이었기에 2024년은 저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더 '특별하게', '특이하게' 기억될 것 같습니다.


학교폭력책임교사라는, 학교에서는 그 누구도 하고 싶어하지 않거나 쉽게 받아들고 싶지 않아 하는 업무를 하면서도 '나'와 방향성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습니다. 가르치는 학생들이 가능하다면 겪지 않았으면 했던 일들을 저와 함께 나눴습니다. 학생들의 학부모님들도 저와 함께 그 시간을 나눴습니다. 어른들이 원하는 것처럼 아이들이 살면서 겪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은 찾아오기 마련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그 어려움을 겪는다 하더라도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힘이 길러지길 바라던 순간들이 참 많았습니다.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보며, 중립적인 입장에서 갈등 관계 및 상황을 살펴보는 일들은 어린 시절 제가 되고 싶었던 법조인, 사법기관에 근무하는 직업인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닮아야만 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처음 이 업무를 맡았을 때의 2022년, 그 1년은 신경성인지 스트레스성인지, 원인 미상의 피부염이 생겼을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살다보니 그런 직업이 갖춰야 할 자질과 태도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경험을 해왔던 저에게는 법조인이 롤모델이었던 시절의 감상만으로 그 강요된 어려움을 감당하기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이 업무를 받아들이고 수행해온 지난 2024년은 처음 이 일을 맡았을 때보다는 단단하게 스스로를 지탱하는 힘이 길러져 있었습니다. 저를 지지해주고 믿어주는 학생안전부장 선생님과 동료 선생님들, 그리고 선생님 힘들지 말라며 응원해주는 학생들 덕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정에서 저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해주는 아내와 가족들의 힘이 가장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대한 감상만으로는 버거웠던 시간과 경험에 대한 생각이 '견딜만한 것'으로 바뀌면서 한층이나마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비단 '교사'로서만의 고민만 하고 살진 않았을 텐데, 그것이 제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인지, 글로나마 반추한 2024년의 기억 중에는 학교에서의 일들이 제법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 명확하게 답을 내린 것은 없지만 살면서 지속해야만 하는 생각과 고민이기에 답을 일찍 내리려고 발버둥치고 싶진 않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고민에 대한 해답을 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아마 2025년 을사년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만 같은 주제의 고민이 쌓이겠지만 내년에 고민할 만한, 색다른 주제를 미리 고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벤야민의 말처럼 그때에는 그때의 순간에 '지나가버린 것'이 주제가 되어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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