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의 기억 속에서 선생님을 잊을 만큼 행복하렴." - 역사교사 박예정
가르치는 아이들이 졸업을 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5년, 중학교에서 3년을 보내면서 수많은 아이들을 만나왔습니다만 헤어짐의 시간 앞에서는 마음 한 구석이 몽글몽글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즐거웠던 기억은 부각되고, 힘들었던 순간들은 희석되거나 다르게 읽히게 됩니다. 졸업식을 마친 아이들이 모두 학교를 떠나고 조용한 교무실에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습니다. 학교폭력책임교사이자 비담임으로서 2024년 한 해를 보내는 동안 아이들과 나눈 시간들이 흐릿하면서도 명료하게 스쳐 지나갔습니다. 맡은 업무가 업무인지라 아이들의 마음이 아픈 이야기를 많이 나눴습니다. 마음을 보듬는 말들도 많았지만 교육자로서 가르쳐야 할 부분을 단호하게 전했던 말들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와중에 아이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욕심 때문인지 제가 살면서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시시콜콜한 농담도 참 많이 주고 받았습니다. 교사의 언행이 학생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이 상당히 지대하다고 하던데 저의 말로 인해 부끄러워지는 순간들도 떠오르는 걸 보면 역시 앞으로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욕심은 많고 해주고 싶은 말은 있었기에 아이들과의 마지막 시간은 격려와 응원, 당부의 말을 남기고 어떻게든 싶었습니다. 비담임이었기 때문에 졸업식 때 저의 마음을 전해줄 기회가 없어 각 학급별 마지막 역사 시간을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시간으로 활용했습니다. 건강과 행복을 비는 말,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는 말, 너희와 함께 해서 행복했다는 말처럼 헤어짐을 앞두고 꼭 해줘야 할 이야기들에도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았습니다. 아이들을 처음 만나던 날 가장 먼저 꺼냈던 잔소리 1호, "기분이 태도가 되지 말자."도 잊지 않고 전해주었습니다. 오죽 자주 이야기했으면 학교문화책임규약 1항이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겠습니다."였을 정도이니 스스로 생각해도 아이들이 귀가 아팠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한된 시간 안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았지만 아이들에게 마지막으로 강조하여 당부하고 싶었던 말이 있습니다. ; "너희의 기억 속에서 선생님을 잊을 만큼 행복하렴."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제 학창 시절, 그동안의 가르침에 대한 감사함을 담아 인사를 올렸던 저의 선생님들을 떠올려 봤습니다. 그런데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주인공이 어린 시절에 상상 속에서 만난 친구가 사라지듯 제 기억에서 그 감사한 존재가 흐릿해지다 못해 사라졌습니다. 그 자리에서 혼자 한참을 죄송해 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죄송함은 한동안 제 마음의 꽤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래도 마냥 죄송할 수만은 없으니 아이들에게 '간이역' 역사 교사답게 저의 이야기를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서 전한 말이 위와 같은 말이었습니다. 아직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었을 텐데도 몇몇 아이들은 괜히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습니다. 마치 제가 전하고 싶었던 진심을 눈치라도 챘던 것일까요? 저마저도 눈시울이 붉어질까 그 아이들의 눈을 오랫동안 쳐다보기 힘들었습니다.
살다보면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오랫동안 기억될 것들도 많이 있지만 어느샌가 사라진 기억들도 많습니다. 가능한 한 긍정적이고 행복했던 순간의 회로를 어떻게든 붙잡아 기억의 순위를 매겨 정돈했다고 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렇다고 사라진 기억에 대한 아까움이나 후회가 남지는 않습니다. 사라진 기억들이 쌓여 만들어진 어떤 것조차도 저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잊은 것에 대한 죄송함이 컸던 저는 감사한 선생님들이 계셨다는 것, 살아가면서 행복함에 취했던 기억들이 더 많았다는 것, 사람의 기억에는 순위가 매겨지고 행복한 기억과 감사한 기억이 그 자리를 차지해서 원래의 기억이 지워지기도 한다는 것 등 당연한 사실들을 더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한 진리이겠지만, 스스로 인정을 하고나니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조금은 정리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얘들아, 살아가면서 마주할 많은 순간들이 쌓게 해줄 기억들 중 행복한 기억들이 너희의 기억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길 바란다. 그 자리가 채워지다보니 어느새 선생님의 이름이 지워지고 기억나지 않는다면 선생님은 기쁠 것 같다. 잊어도 좋으니 행복해라. 너희의 인생에 잠시 머물다가 간 선생님이 있었다는 역사는 변하지 않으니 이후의 역사는 너희가 새롭게 써내려 가라. 그러다가 선생님의 이름 석 자가 사라진다 해도 역사가 아닌 것은 아니다. 과거의 기억에 매료되어 행복한 추억 여행을 하는 것도 좋다. 그 자리에 선생님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겠지만 선생님도 살아보니 더 감사한 기억들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워주기도 하더라. 그러니 앞으로의 너희의 삶에 가득하길 바라는 행복이 선생님의 자리를 대신하길 바란다."
이제는 더욱 각자의 자리에서 빛을 발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게 될 저의 제자들의 마음이, 제 이름 세 글자 대신, 자신을 더욱 감사하고 고맙고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이들의 이름과 기억으로 가득차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