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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 역사 교사가 사랑하는 문장들 #28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는 얼마나 많은 폼젤이 숨어 있을까?"

by 박예정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어느 영역이 있습니다. 바로 프리모 레비가 '회색지대'라고 불렀던 영역입니다. '흑'과 '백'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의 틀로는 설명되지 않는 영역인 회색지대에 머무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를 하나의 관점 또는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게 해줍니다.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이자 지식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고통의 시간 속에서 독일인이지만 유대인을 위하는 자, 유대인이지만 홀로코스트에 적극 가담한 자, 유대인도 독일인도 아니지만 홀로코스트에 가담하거나 반대한 자 등 하나의 시선과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여러 인물들이 교차하는 순간들을 만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것이 인간인가>와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등 여러 저서에서 유언장을 쓰듯이 증언해 갔습니다.


회색지대에 대한 역사적인 증언은 프리모 레비의 저서에서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서로 표현하는 바는 다르겠지만 많은 이들이 홀로코스트라는 사건 속에서 발견한 회색지대를 이야기합니다. 제가 아는 바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아트 슈피겔만의 책 <쥐>에서도 나타나고, 장 아메리의 <죄와 속죄의 저편>, 그리고 홀로코스트 증언 문학 중 가장 잘 알려진 저서인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등 다양한 목소리가 회색지대의 존재를 증언합니다.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한국사 수업 시간에 종종 이들이 이야기하는 회색지대를 이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가르칠 때에도 등장하고, 역사와 미디어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수업에서도 영화 <밀정>이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인용할 때에도 등장합니다. 교사 한 사람의 욕심으로 학생들이 당장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는 개념을 설명하는 것에 따르는 위험이 있습니다만 언젠가는 알아가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수업을 하곤 합니다.


브룬힐데 폼젤의 생애와 그녀의 증언을 다룬 책 <어느 독일인의 삶>은 제목만 보면 나치 치하의 독일을 살아가던 한 개인의 한 맺힌 삶을 다룰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부제를 살펴보고 그 내용을 조금만 읽어보면 폼젤의 역사적 위치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폼젤은 자신 또한 회색지대에 살던 사람이라는 변명을 이어갑니다. 아이히만이 예루살렘에서 열린 재판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일제 강점기에 민족을 배반하는 행위를 했던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때로는 식민지 시기의 역사를 가르칠 때 나타나기도 하는 '오늘날의 기억을 안고 간다면 저도 친일을 했을 거 같아요.'라고 이야기하는 아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프리모 레비가 말했던 회색지대는 위에서 말한 그들이 몸을 숨기기 위한 은신처로서의 영역이 아닙니다. 시류에 따라 살고자 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들 중 서로의 영역이 아닌 곳에서 삶과 목숨을 버려가며 선택을 했던 사람들의 영역이, 제가 생각하는 프리모 레비의 회색지대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대세 속에서도 사람으로서의 가치와 신념에 대한 상식이 바로 서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자리가 회색지대입니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여겨지는 것들을 지켜내기 위해 머무르기를 꺼리지 않았던 자리라고 인식되어야 합니다.


발터 벤야민이 역사로부터 구조하여 바라봐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기억들도 회색지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서경식 선생님이 이야기했던 존재와 시간들도 회색지대에 남아 있습니다. 물을 길어 올리듯 깊숙한 곳에서 퍼올려야 비로소 보이는 역사의 자리가 회색지대입니다. 역사의 평가로부터 벗어나거나 책임을 회피하려는 그들을 위한 영역이 아닙니다. '역사가 당신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를 기억하라.'는 경고가 힘을 많이 잃어가는 요즘입니다. 이 책을 통해 느낀 감상과 요즘의 우리 사회가 놓인 상황이 계속 겹쳐 보이는 것, 그리고 역사를 공부하며 감히 그려보는 앞날에 대한 불안이 뒤섞입니다만, 오히려 그와 같은 상황에서 희망이 주는 힘만이 시간과 함께 어지럽혀진 마음을 가라앉혀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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