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간이역' 역사 교사가 사랑하는 문장들 #29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 이정록

by 박예정

방학을 맞이하고서 2주일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내와 함께 매일 아침 운동을 하고, 아내가 출근하고나면 집안일을 하면서 제가 누리고 싶었던 취미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역사 교사로서 다시금 공부에 매진하고 싶다는 생각과 더불어 한 사람으로서의 교양과 꿈을 다시 키워가고 싶다는 생각에 소홀했던 독서도 천천히 시작하고 있습니다. 교사에게 방학은 쉼의 시간이자 재충전의 시간이며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한 전문성 향상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시기이기에 이 시간을 잘 쓰고 싶어 마냥 쉬지만도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 들으면 배부른 소리한다며 핀잔을 주겠지요. 그 핀잔에 일일이 답을 하던 저의 예전 모습은 이미 사라진 것 같습니다. 말그대로 '팩트(fact)'이니까요.


오늘은 동네에 평소 가보고 싶었던 예쁜 카페를 방문했습니다. 인조적으로 만들긴 했지만 나름 호수공원 인근이고 귀여운 강아지들이 자주 산책하는 곳에 위치해서 오염된 것 같은 시선에 환기를 주고자 방문했습니다. 커피 한 잔을 시키고 책을 보니 대학생 때의 제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았습니다. 운동을 좋아하긴 했지만 독서를 더 좋아했고, 공부하고자 하는 열의가 더 넘쳐서 되고자 하는 인간상에 가까워지려 치열하게 노력했던 시절의 제가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문장을 수집하고 정리하며 제 생각을 1인치라도 조금 더 키워보려 애쓴 그 짧은 시간이 유난히 하루를 잘 보낸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착각을 들게 했습니다.


카페에서 나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서점에 들렀습니다. 처음 이 동네에 이사를 왔을 때 제일 반가웠던 것이 도보로 5분 거리 정도에 서점이 위치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주로 소비하는 종류의 책은 많지 않지만 가끔 들러서 조용히 책을 둘러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가뜩이나 삭막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쉼터 같아 그저 반갑기만 했습니다.


새 학년, 새 학기에 가르치게 될 과목과 관련된 책들을 둘러보다가 매대에 올려져 있는 다른 분야의 책들을 들었다 내렸다를 반복했습니다. 사지 않더라도, 한 페이지, 한 문장이라도 슬쩍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와 가슴이 채워지는 것 같은 허세가 기분 좋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주한 어느 책의 한 페이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필사를 위해 만들어진 책의 한 페이지에는 이정록의 시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 중 일부가 바로 이 문장입니다.


"마을이 가까울수록 / 나무는 흠집이 많다. / 내 몸이 너무 성하다."

- 이정록,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문학동네, 2004, 11쪽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많은 시간과 노력, 감정을 쏟아내고 담기도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 문장이 담고 있는 통찰은 강렬했습니다. 짧은 문장이지만 그 속에 품고 있는 의미는 저의 상황뿐 아니라 우리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하는 말 같았습니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는 말에서는 어렴풋이 느껴지는 고립과 외로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고,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는 말에서는 사람들 틈에서 받게 되는 상처나 여러 기억들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게 합니다. 뾰족하게 생각의 결론이 내려지지 않지만 '쿵'하고 와닿는 문장을 모으는 게 취미인 저에게는 이래저래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고마운 문장이었습니다. ㅇㅇ 나무는 흠집이 많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간이역' 역사 교사가 사랑하는 문장들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