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수 작가
기억은 언제나 흐릿하게 우리 곁을 지킨다. 분명히 존재했던 어떤 감정, 어떤 표정, 어떤 장소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차 희미해지고, 그 빈자리를 상상과 왜곡, 그리고 마음속 잔상이 채워나가게 된다. 전민수 작가의 회화는 바로 그 틈 — 기억과 상상, 현실과 허상의 경계에서 시작된다.
작가의 화면에는 가족이 있다. 그러나 그 가족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단란하고 명확한 ‘가족사진’의 이미지와는 다르다. 크로마키 배경 앞에 서 있는 가족은 여행지의 사진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은 존재들이다. 푸른 배경은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을 부여하지만, 결국은 도달하지 못한 장소,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시간만을 환기시킨다. 아버지는 카메라 앞에서 여전히 권위 있게 서 있지만, 가족은 그 시선 너머에서 지쳐 있고, 무언가를 말하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버티고 있다.
이러한 작업 속 장면들은 때때로 말이 없던 여행의 풍경을 소환하기도 한다. 휴게소조차 없던 시절, 갓길에 정차한 버스, 차창에 비친 흐릿한 얼굴,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 가족들. 말없는 그 여행은 작가에게 있어 현실의 가족인지, 기억 속의 유령인지조차 분간되지 않는 ‘기억의 몽타주’다. 전민수의 회화는 이러한 개인적 회상의 편린을 통해, 우리 모두가 경험했을 법한 보편적 감정의 풍경을 끄집어낸다.
작가의 세계에는 유년의 고요한 피난처 또한 존재한다. 만화책으로 만든 작은 공간에 웅크린 아이의 모습은 종이로 된 상상의 세계가 얼마나 따뜻하고 안전한지, 또 동시에 얼마나 고립되고 외로운지를 보여준다. 그곳은 어머니의 자궁처럼 평온하지만, 세상과 단절된 폐쇄의 공간이기도 하다. 아이는 숨는다. 현실의 복잡함을 견딜 수 없을 때, 우리는 종종 어린 시절의 자기 자신처럼 자신만의 틈을 찾는다. 작가는 그 틈을 세심하게 응시하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들은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아니다. 그것은 ‘재구성된 기억’이다. 카메라 앞에서 웃고 있는 아버지와 아이들, 팩을 하고 웃고 있는 형제, 유리창에 비친 그림자 같은 얼굴들. 각각의 장면들은 마치 오래된 사진을 스캔하다가 흔들려버린 듯 왜곡되고, 분절되며, 흐릿하게 재편된다. 오래된 텔레비전 모니터 속에서 분해되는 가족의 얼굴처럼, 우리의 기억은 언제나 조각나 있고 편집되며, 어떤 감정은 끝내 말로 다할 수 없다.
따라서 그의 작업들은 단지 작가의 가족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간직하고 있는 ‘사소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장면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날은 아무 일도 없었지.” 작가가 소환하는 이 한 문장은, 결국 가장 많은 일이 일어난 날을 가리킨다. 말도 없고, 사건도 없었던 평범한 하루.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속에는 이미 모든 감정의 씨앗들이 심어져 있었다. 상처와 무너짐, 떠남과 소외는 그렇게 조용히 시작된다.
전민수의 회화 속 인물들은 종종 어딘가를 떠나고 있다. 칠성 아래에서 첫 생일을 맞이한 아이, 칼라 사진 속의 나와 흑백으로 흐릿해진 엄마, 얼굴 위에 알록달록한 입자가 덧입혀진 엄마의 초상. 이들은 모두 지금은 볼 수 없거나, 다시 만날 수 없는 존재처럼 화면을 채운다. “멀리 떠나는 꿈. 그리고 여름.”이라는 문장처럼, 작가의 기억은 계절과 감정의 이미지로 되살아난다. 그것은 시간의 간극을 딛고 흐르는 물이며, 흐릿한 하늘 아래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이다.
작가의 외할아버지와 이모들의 사진은 특히나 강한 낯섦을 안겨준다. 외계에서 온 것 같은 피부색, 무대 위에 세운 듯한 정형화된 자세는 과거라는 시간이 우리에게 얼마나 이질적인 감각으로 다가오는지를 상기시킨다. 가족은 친밀하지만, 동시에 이방인이다. 얼굴은 익숙하지만, 삶은 낯설다. 고양이처럼 주변을 감싸는 감정—의심과 거리감—은 작가가 기억을 대하는 방식의 핵심이기도 하다.
작가의 《기억의 순간》은 사진으로 남은 장면들, 그 장면 뒤에 감춰진 감정, 그리고 시간이 만든 왜곡을 그려낸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 속으로 다시 살아나는’ 기억의 복원이다. 유년의 감정이란 항상 진지하고, 이상하고, 슬며시 웃음이 나올 만큼 기이하다. 작가는 그 진지하고 이상한 세계를 연극처럼, 혹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재구성한다.
작가는 묻는다. 우리가 기억하는 가족은 과연 실제였는가? 혹은 우리가 기억하기를 원했던 방식으로만 존재하는 허상이었는가? 하지만, 작가는 그의 회화를 통해 이 질문들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부드럽게, 한 장면 한 장면을 꺼내어 놓는다. 말하자면, 이것은 기억의 한 컷이고, 감정의 앨범이며,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가 그려낸 ‘기억의 순간’은 우리 모두의 것이 된다.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된 장면은, 결국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와, 조용히 재생되고 있다. (글. 임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