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진섭 작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기준은 있을 수 없을 것 같다. 나의 할머니의 할머니, 또 할머니의 할머니로부터 이어져 온 우리의 삶을 지금, 이 시대에 무엇이라고 정의해 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언제나 삶의 의미는 진실을 진실 그대로 밝힐 수는 없었다. 여전히 우리는 지속되고 있는 우리의 삶, 일상이 어제와 갔고 내일도 오늘과 같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고 있고 또한, 그렇게 살고 있음으로 우리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우리였을 수 있음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로 심진섭 작가의 주인공의 일상은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거나 아예 멀어지고자 한다. 더 이상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기준으로 평가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내가 나일 수 있었을 그 때의 모습으로 그렇지 못하는 우리의 삶을 살짝 비꼬기도 한다. 그의 주인공이 손으로 가리는 것은 얼굴이 아니라 비꼬면서 나오는 웃음이라는 것.
따라서 심진섭 작가가 그리고 있는 주인공이 늘 겪었을 세상의 기준에 대한 소심한 저항은 정당했다. 더 이상 주변의 시선 속으로 숨거나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감추거나 해야 할 이유는 없다.
흔히 볼 수 있는 벽지나 이불의 패턴 속에 자신을 감추고자 하는 작가의 주인공은 사실, 시대의 흐름에 그리고 시대가 던져 준 방법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의 일상에 대한 일종의 경고일 수 있다. 시대의 흐름에 자신을 감추고 그 패션에, 트랜드에 묻혀가는 것이 어쩌면 세상을 잘 살고 있는 것 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삶이 과연 나일 수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시작되면서 결국, 세상이 만들어 놓은 패턴 속의 주인공처럼 허무하게 웃거나, 숨거나, 가면을 쓸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심진섭 작가의 주인공은 현재,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에서 세상과 보다 더 객관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접점을 찾고 있다. 물론, 앞으로 그 주인공의 일상의 공간이 더 확장되겠지만. 지금은 너무나 개인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의 과연 우리가 살고자 했던 일상이었는지에 대한 위트 있는 경고와 함께.
우리가 지금의 일상을 살면서 세상에 보여주고자 하는 나의 모습과 세상이 보고 싶어 하는 나의모습이 너무나 다르게 느껴지는 순간, 그 간극 사이에서 작가의 주인공은, 그녀의 눈빛과 몸짓으로 이미 그 경계를 충분히 넘나들고 있다. (글. 임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