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인류의 진화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강력한 에너지였다. 우리는 생각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변화시켜 왔다. 하지만 생각은 단순히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나 사고의 과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간직하고, 마음에 그리며, 믿는 행위까지 포괄하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행위이다. 이와 같이 생각은 언어와 문화를 넘어서 다양한 민족과 역사를 결속하는 힘으로 작용해 왔다. 물론, 그 생각이 서로 다를 때 인류는 때로 갈등과 분열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그 모든 과정조차 결국 '생각'이라는 본질적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생각의 이면에는 항상 대상을 향한 응시와 접촉이 자리 하고 있다. 인간의 사고는 대개 사물, 현상, 혹은 추상적 개념과의 관계 속에서 출발한다. 언어의 뿌리에서도 이 관계는 명확히 드러난다. ‘Think(생각하다)’와 ‘Thing(사물)’이 동일한 어원을 가진다는 사실은, 사고라는 행위가 대상을 필요로 하고, 대상과의 교감을 통해 정의되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제나 주변의 사물과 현상을 사고의 대상으로 삼았고, 이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거나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왔다. 하지만 이런 창조적 과정은 늘 완결을 미루고 결국 생각은 생각은 끝없이 확장되며, 새로운 질문과 가능성을 만든다.
강석문 작가는 그리기 보다는 떠오르는 것이 중요한 작가다. 다시 말해, 그리기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떠올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떠오르는 순간 그리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사물 즉, 대상은 중요하지 않다. 처음 붓을 들고 그 붓이 종이에 닿는 순간 떠오르는 대상을 그린다. 그의 그리는 행위는 생각하는 과정을 탐구하는 일종의 생각의 순간을 찾는 행위다. 순간의 생각으로 움직여지는 손, 그리고 그 손의 움직임으로 작가의 경험으로부터 쌓여진 감정들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작가가 직접 제작한 (제작했다기 보다는 빚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맞을 듯 하다), 종이는 닥나무를 심는 것부터 시작해서 만들어진다. 닥나무가 자라고 펄프가 되기까지 기다리는 과정 자체부터 작가의 붓은 ‘무엇을 그릴 것이 아니라 무엇이 떠오를까’를 생각한다. 닥나무가 자라고 그 나무가 펄프가 되기까지 지난한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종이를 접한 작가의 붓은 생각하기 보다 먼저 움직인다. 그에게 그림은 그리는 것 보다는 온 정신을 집중해서 한 획의 난을 치듯이 온통 붓끝에 모든 생각을 담는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붓은 절대 생각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체득했기 때문이다. 작가의 생각은 그렇게 심해처럼 점점 깊어진다.
강석문 작가가 들고자 하는 붓은 구체적이고 명확한 사물과 생각의 정의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흐름과 흔적을 담고자 하는 매개다. 작가가 남겨두는 여백은 단순히 그려지지 않은 빈 공간이라기 보다 매 순간 떠오르는 생각들이 머무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오히려 그려지지 않음으로써 느껴지는 생각들이 확장되는 공간이다.
궁극적으로 모든 회화는 추상으로 집중될 것이다라고 하는 작가의 말이 극단적일 수 있겠지만 사실, 그림은 인간의 정신 활동의 결과물이었고 다른 그 어떤 매체로 대체될 수 없는 강력한 욕망을 드러낼 수 있는 매체였다. 요컨대, 그림은 궁극적으로 추상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요할 수는 없겠지만 생각은 절대 물질화 될 수 없음을 감안해 본다면, 우리가 상상하는 그리고 생각하는 모든 순간이 추상 즉, 생각을 끝까지 몰아 갈 수 있는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어야 그나마 생각이 조금 자유로워 질 수 있을 것 같다. 강석문 작가의 ‘새’들이 실눈을 뜨고 우리에게 건네는 말이 그것일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