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도 아닌데

by 서초동 김원장

만개한 벚꽃이

작은 바람에도 흐드러지게 흩날리던 그런 날이었다.


명절이나 특별한 날이면

가족과 친척들에게 선물하려고

손수 공진단을 만들어 오시던 고객님이 계셨다.


약재시장까지 직접 가셔서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히 고르고 또 고른,

정성 가득한 귀한 공진단이었다.


그 귀한 걸

감사하게도 나에게 늘 나눠 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이 반쪽이 된 모습으로 커트를 하러 오셨다.


자식들은 법조인, 의료인으로 훌륭히 키워내시고

손주들까지 돌보며 살아오신 분.

이제 막 70대에 접어드신 분이었다.


몸이 반쪽이 된 이유는

급성 폐암 때문이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큰 병원에서 건강검진까지 받으셨다는데

급성이라 어쩔 수 없었던 걸까.


누군가는 말한다.

폐암은 속도전이라고.

검진을 해도 워낙 빠르니

뇌전이, 뼈 전이는 순식간이라고.


우리 가족도

50대에 폐암으로 네 분이나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는 늘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나는

그 귀한 공진단을

'쓰다'라는 이유로

아직 젊다는 이유로

잘 먹지 않았다.


건강 염려증이 심한

애들 아빠가 그때마다 호사를 누렸다.


암 진단을 받으신 뒤

세 번째쯤 오셨을 때였던가.


기력도 없으실 텐데

또 공진단을 만들어 오셨다.


그때는 정말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나 이제 요양병원으로 가.

가면 또 언제 이걸 만들어주겠어.


그동안 내 머리 예쁘게 해 줘서 고마워.

머리 하고 싶을 때

언제든 갈 수 있는 미용실이 있어서 참 편했어.


건강하게 잘 지내셔."


그 말씀이 마지막이었다.


시간이 꽤 흐른 뒤

따님이 머리를 하러 오셨다.


나는 조심스레

어머님의 안부를 물었다.


따님의 눈가에

눈물이 순식간에 맺혔고,

나도 덩달아 목이 메었다.


돌아가신 지 49제가 지났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고

무심코 창밖을 보니

유난히 만개한 벚꽃이

꽃비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창문 너머 풍경은

너무도 아름다운데,

미용실 안 공기는

그동안 쌓인 정과

머리를 해드리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날,

고객님도 울고

나도 울었다.


그날 이후다.


그분은 그렇게 자상한 분도 아니었다


조금은 깐깐하고

무뚝뚝하셨던 분이셨다.


그런데도


돌아가신 지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벚꽃이 흐드러지게 흩날릴 때면

나는 자연스럽게 그분이 떠오른다.


우리 친정엄마도 아닌데.


이제는 아주 가끔

그분의 따님과도

눈시울을 적시며

그 시절을 이야기한다.


영원한 건 없다지만,

자꾸만 옛날이 그리워지는 건

나이가 들어서일까.


참 감사하다.


나는 그저

돈을 받고 머리를 잘라주는

미용사일 뿐인데.


마지막까지

나를 챙겨주셨다는 것,


"그동안 머리 이쁘게 해 줘서 고마워."


그 한마디가

지금까지도

내겐 잊히지 않는 감동으로 남아 있다.


나는 과연

그 순간이 오면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있을까.


가끔은

내 한계를 넘어설 만큼

힘든 날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나를 기억해 주는 고객님들을 떠올리며

다시 힘을 낸다.


나의 원동력인 가족,

그리고

나를 찾아와 주시는 고객들이 있기에

오늘도 나는

흔들림 없이

담담하게 파이팅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