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교수님의 추천으로 들어간 나의 첫 직장.
이대 2호점, 쟈끄데상쥬 헤어살롱.
1999년
지금으로부터 27년 전이다.
그때 나는
나고 자란 충청도를 처음으로 벗어나
'서울'이란 어마어마한 도시로 상경했다.
신촌 하숙집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월급은 46만 원, 하숙비는 30만 원.
지금 생각하면 빠듯했지만
그땐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하숙집은 신촌기차역 근처였고
룸메이트는 이화여대 신방과 학생이었다.
집에는 늘 이대 학생들이 들락거렸다.
같이 서울로 올라온 동기 친구는 연예인 미용실로,
나는 쟈끄데상쥬로
각자의 길을 선택했다.
나의 담당 선생님은 나와 같은 나이였지만
이미 프로 중의 프로였다.
기술 앞에서는 나이가
아무 의미 없다는 걸
그때 처음 배웠다.
하루라도 먼저 입사한 사람이
하늘 같은 선배가 되는 세계.
입사 초반엔
무언가를 배우기보다
하루 열 시간을 입구에 서서
오시는 고객님, 가시는 고객님께
인사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접객 서비스 매뉴얼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문서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책 한 권 분량을
달달달 외우지 않으면 안 됐다.
그다음이 샴푸 단계였다.
퇴근 후 마네킹을 들고
하숙집 욕실로 들어가
몇 시간씩 샴푸 마사지를 연습하던 날들.
손님이
연습 대상이 될 수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실수는 있었다.
그럴 때마다
호되게 혼났다.
하루 근무를 마쳐도
집에 곧장 가지 않았다.
혼자 남아
매일 연습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열정으로 공부를 했으면
하버드도 갔을 것 같다.
재미도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혼나는 게 무서워서
지독하게 연습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하.
나의 선생님은
손님도 많고, 매출도 늘 탑이었고
밥 먹는 시간 외엔
앉아 있을 틈이 없는 분이었다.
그리고...
아주아주 무서운
호랑이였다.
오히려 그래서
내가 연습벌레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키워진
호랑이 새끼였던 나는
어느새 디자이너 명찰을 달았고
첫 발령지는
쟈끄데상쥬 도곡점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도곡점 발령은
내 인생에서 손꼽히는 행운이었다.
그곳은
마치 정의의 부대 같았다.
보통 미용실에는
프로와 아직 성장 중인 디자이너가 섞여 있는데
그곳은 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커트의 신들이었다.
디자이너가 됐다고 끝은 아니었다.
그때부터 진짜 시작이었고
그곳은
나의 천국이었다.
이대점에서 기본을 배웠다면
도곡점에서는
미용사로서 오랜 시간이 걸려야 터득할
고급 기술들이
자연스럽게 몸에 스며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어떤 헤어스타일 사진을 가져와도
3초면
도해도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디자이너 되자마자
사장님께 전액을 빌려
파리 연수를 다녀왔고
헤어쇼 무대에도 섰다.
두 번째 연수는
당당히 내 돈으로 다녀왔고
또다시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도곡점에서
그 대단한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엑설런트를 달았다.
물론
실력은 여전히
그분들이 더 훌륭하다.
그땐 정말
무서운 게 없었다.
돈도 없으면서
그 어려운 사장님께
연수비를 달라고 했던 그 용기
본사 프로젝트에도 빠지지 않았고
안 되는 스타일이 있으면
백만 원 단위로 가발을 사
퇴근 후 마음에 들 때까지 연습했다.
디자이너가 되어서도
나는 여전히 연습벌레였다.
나중에는 가발 대신
겉으로는 봉사라는 이름으로
실은 연습의 연장선인
쉬는 날마다
교회로, 요양원으로 향했다.
쟈끄는
내 인생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단연 1순위다.
지금까지 내가
먹고살 수 있도록
단단한 발판을 만들어준 곳.
특히 커트
그중에서도 레이어드 커트는
내 기준에서
단연 최고다.
쟈끄 커트의 가장 큰 매력은
막 잘랐을 때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예뻐진다는 것.
그래서 한 번 쟈끄 커트를 경험한 손님들은
이사를 가도
성당처럼 위치를 검색한다.
지금 내 단골 고객들 대부분이 그렇다.
인턴 시절
한밤중까지 연습하던 나를 보고
"아니, 누가 날마다 불을 이렇게 다 켜놔?
또 너야?"
하며
4층 사무실에서
인상을 찌푸리며 내려오시던 이사님.
첫 월급을 받고
박카스를 들고
겁도 없이 당당히 찾아갔던 사장님실
월급은 작았지만
인턴들끼리 팁을 모아
홍대 뒷골목 돼지껍데기 집에서
그날의 스트레스를 털어내던 밤들.
나의 첫 해외여행지는
쟈끄데상쥬 본사가 있는
파리였다.
헤어쇼 무대에 섰을 때
관객들이
오히려 또렷하게 보였다.
떨리기는커녕
천장에서 쏟아지는 조명의 열기가
포근하게 느껴져
조금이라도 더 멋있게 보이려고
이리저리 폼 잡아가며
가위를 놀리던 나.
그때 알았다.
아, 나 무대 체질이구나.
주머니는 가벼웠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웠던
참 많이 행복했던 그 시절
지금 나는
서초동
열 평짜리
1인 미용실 원장이 되었지만,
이만큼이나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건
내 마음의 고향,
쟈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쟈끄가 아니었다면
미용사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나이가 들어도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준 곳.
나를
미용사로 만들어 준 곳.
쟈끄데상쥬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