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는 사실 그리 거창하진 않다. 길가의 풀처럼 그냥 살면 된다는 말도 있듯이 나름의 소소한 기쁨을 찾으며 살면 그만이다. 마찬가지로 절망에 빠진 누군가를 일어서게 하는 말 한마디도 그리 위대한 말이 아니다. 모든 건 사소한 말 한마디에서 시작되며 그 속에 담긴 진심이 사람 간의 진실한 관계성을 결정짓는다.
뮤지컬 <카르밀라>는 뱀파이어 ‘카르밀라’와 인간 ‘로라’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다. 지난 6월 11일부터 오는 9월 8일까지 혜화역 링크아트센터드림에서 공연을 진행한다.
결핍을 충족시키는 사랑은
“언니, 우리 친구할래? 나랑 같이 우리집에 가자.”
공연의 도입부는 어린 소녀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친근하고 다정한 말투지만 그 언어는 다소 진부하기에 별 뜻이 없다고 여겨질 수 있으나, 카르밀라는 이 몇 마디로 인해 소녀 로라에게 마음을 연다. 그리고 끝에서는 로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지경까지 이른다.
공연을 보는 관객으로서는 이 말 한마디로 카르밀라가 로라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을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둘은 서로의 결핍을 충족한 사랑이라는 점에서 충분한 이유가 존재한다.
먼저 카르밀라의 경우 뱀파이어라는 신분으로 인해 모두가 그를 적대시하고 등을 돌린다. 그로 인해 영생에 지쳐 삶을 끝내려는 순간 로라를 만나게 된다. 로라 역시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방 안에만 갇혀 있던 힘든 기억이 있다. 좁은 시야에 매몰되어 삶을 비관하고 세상을 원망할 때 카르밀라를 마주하게 된다.
사방을 적이라고 인식해 세상을 증오했던 카르밀라에게 로라의 따뜻함은 그 온기가 유일무이하게 느껴졌을 것이며, 카르밀라를 만난 후 우울감에서 벗어나 왠지 모를 행복감을 만끽했을 로라에게 이 둘은 서로를 충족하고 서로를 통해 위로받는 관계로 발전한다.
지도 하나로도 여행을 가능케 하고
공연의 핵심 소재 중 하나로 등장하는 지도는 로라의 가장 소중한 물건 중 하나이다. 어린 시절 뱀파이어에게 아버지를 잃어 집안에만 있었던 로라는 세상 밖을 잘 알지 못한다. 좁은 시야와 좁은 세상에서 늘 넓은 삶을 갈망해왔던 그는 카르밀라를 만나고 함께 시야를 넓혀 나간다.
비록 그들이 직접 세상을 경험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도 하나로도 두 사람은 함께 하는 모습을 즐겁게 상상한다. 축제가 열리는 도시도, 많은 사람이 있는 곳도, 낮잠을 자는 한적한 곳도 모두 누비며 즐거운 여행을 한다. 발길을 멈춰서도 가능한 여행은 같이하는 모든 곳이 로라와 카르밀라의 목적지가 된다. 세상이 두려웠던 로라도, 혼자라고 생각했던 카르밀라도 이제 더는 두렵지 않다.
한편 로라와 카르밀라의 사랑은 닉과 카르밀라의 관계와는 뚜렷이 대조된다. 처음 로라를 만난 날, 카르밀라를 자신의 친언니라고 소개한 ‘닉’은 그녀에게 집착할 뿐 아니라 협박과 가까운 말을 내뱉는다. 자기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로라를 위험에 빠트리겠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모습은, 카르밀라에 대한 닉의 사랑을 종속적 형태로 나타낸다.
그리하여 공연의 후반부, 닉이 죽음을 맞이하며 카르밀라를 향해 울부짖는 장면은 잘못된 사랑의 표현 방식을 드러낸다. ‘오직 너만 바라보며 살아온 나는 어떡하냐’는 닉의 울부짖음은 그 감정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기에 안타깝다. 하지만 사랑의 형태가 서로를 옭아매고 종속되게 한다면 그 사랑은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은 대다수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광기와 집착이 서려 있는 관계의 끝은 결국 파멸이라는 사실은 관객이 닉의 죽음에 해방감과 연민이 담긴 이중적인 감정을 느끼게 했다. 이성적으로는 옳지 않다고 다가오는 행위가 막상 감정이 커지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관객도 인지하고 공감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사랑’의 히아신스로 완성된다
로라의 아버지를 죽이는 데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그때 본인도 있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는 카르밀라는 자신에게 더 다가오는 로라를 밀어낸다. 하지만 로라는 그런 카르밀라에게 굳은 믿음을 쥐여준다.
"카르밀라, 난 네가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몰라.
하지만 나한테 중요한 건 지금의 너야."
이후 보랏빛 히아신스를 걸고 영원히 함께할 것을 맹세하는 장면은 공연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 된다. 사랑에 합리성을 덧대려고 해도 결국은 비이성적으로 변하고, 그것이 이성적이지 않음을 앎에도 불구하고 멈추는 않는 마음과 행위를 잘 나타냈기 때문이다. 과거의 일을 넌지시 언급하며 로라를 혼란스럽게 만들어도, 그 과거를 궁금해하지도 않는 그녀의 행위는 순수한 사랑을 형상화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살아가는 이 세상은 어쩌면 계약으로 얽히고설킨 곳일지도 모른다. 개인과 개인, 기업과 기업, 개인과 기업의 관계 전반에 계약 내용이 명시된 종이와 그 내용을 더욱 확실히 하는 서명이 오가는 세계에서 우리는 줄곧 살아왔다. 그런데 아름답게 핀 꽃 한 송이로 우정을 맹세하는 관계와 고작 그 꽃 한 송이로 믿음을 확신하는 관계는 확실한 증거보다 더 소중한 무언가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렇기에 우정을 넘어선 그들의 사랑은, 약속을 어겼을 시 계약서를 들이밀며 합리성을 따지는 모습이 아닌, 맹세의 대상으로 내건 히아신스가 시들어도 개의치 않을 영원의 모습으로 완성된다. 손을 잡고 천천히 나아가는 로라와 카르밀라의 웃음은 세상의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가도 영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