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아는 것이 힘일까, 모르는 게 약일까

영화 <그을린 사랑>

by epigram



영화의 도입부는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시작한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인 ‘나왈 마르완’은 딸 ‘잔느’와 함께 수영하다가 한 장면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이후 그녀는 며칠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은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을 듣고 충격에 빠진다. 바로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와 존재조차 몰랐던 형제를 찾아 어머니가 쓴 편지를 전하라는 것. 둘은 어머니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나왈의 지난 행적을 파헤친다. 이때부터 비극의 소용돌이는 시작된다.



여정의 시작, 전쟁의 잔해와 기억


어머니 나왈의 행적을 따라간 딸 잔느에게 지난 세월은 전쟁의 흔적이 가득한 곳이다. 기독교 집안의 나왈과 무슬림인 그녀의 연인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함께할 수 없다. 연인은 그 자리에서 총을 맞아 사망하고, 죽은 연인의 아이를 밴 나왈은 아들을 낳지만 그를 키울 수 없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아이라는 증표로 발뒤꿈치에 점 세 개를 새긴 후 아이를 고아원에 보낸다.


이후 아들을 찾기 위해 전쟁 지역을 돌아다니며 고군분투하지만, 쉽지 않다. 종교 갈등으로 인한 전쟁으로 무자비하게 살해당하는 사람을 목도하고, 죽을 위기에 처하고 가까스로 살아남기도 한다. 이후 주요인물을 살해한 죄로 체포당해 수감된다. 이 모든 비극을 겪고도 그녀는 결국 살아남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 무엇도 말하지 않은 채 침묵해왔다. 침묵 끝에 남긴 건 자식들에게 남겨진 유언일 뿐이다.

그녀의 침묵은 상황과 맥락에 대한 단순한 회피가 아니다. 다만 지난 세월 전쟁의 끔찍함 속에서도 말없이 고통과 두려움을 삼키며 눈물 흘렸던 수많은 피해자를 대변한다. 영화 속 전쟁은 레바논 내전을 모티프로 설정했다고 알려져 있을 뿐, 특정 국가나 전쟁 이름을 명시하진 않는다. 그만큼 이 내용은 특정 국가나 상황에 국한된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자, 그 상황 속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복원한다.


진실의 탐색, 정체성의 뿌리를 찾아서


여러 어려움 끝에도 어머니의 행적을 포기하지 않던 잔느는 나왈이 감옥에서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왈은 고문 전문가 ‘아부 타렉’에 의해 성폭행당해 쌍둥이 남매를 낳은 것이었으며, 그 쌍둥이 남매가 바로 잔느와 시몽이다.

이제 아버지의 행적만이 남은 상황 속 남매는 충격적인 사실을 듣는다. 이 사실은 관객도 충격으로 몰아넣은 핵심으로 자리하는데, 바로 어머니를 강간한 ‘아부 타렉’이 남매의 아버지이자 지난 세월 어머니가 그토록 찾았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나왈은 수영장에서 발에 새겨놓은 징표로 아들을 발견했고, 그의 얼굴을 보고 큰 충격에 빠진 것이었다. 이보다 고통스러운 진실이 어디 있겠는가. 남매가 그토록 찾아 헤맨 정체성의 뿌리는 발견했음에도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고 비극적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나왈은 이 사실을 침묵으로 묻어두는 것이 아닌 드러내는 것을 택했다. 쌍둥이 남매가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그 뿌리를 발견하길 원한 그녀의 마음은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고통의 굴레를 끊어내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다. 어머니의 비극을 마주한 남매는 지난 세대의 과오를 인지하고 자신의 정체성으로부터 비롯된 책임을 가져야 비로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영화는 어머니가 고통 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다시 꺼내 남매가 스스로 만들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낸다.

진실의 마무리, 그 끝의 용서


결국 잔느와 시몽은 새로운 이름으로 살고 있는 자신의 아버지이자 오빠인 아부 타렉을 찾아가 어머니가 쓴 두 통의 편지를 건넨다. 편지 한 통은 그녀에게 고통과 상처를 입힌 고문 기술자에게, 또 다른 한 통은 그녀가 그토록 찾아 헤맨 아들에게 적은 편지다. 그리고 고문 기술자가 아닌, 아들에게 전하는 편지에는 어머니의 사랑이 따뜻하게 담겨있다. 아들이 태어날 때, 어떤 일이 있어도 널 사랑할 것이란 약속을 나왈은 끝내 지켜냈다. 아부 타렉이 나왈에게 한 지난 흔적을 용서함으로써 그녀는 분노의 흐름을 끊어냈다.

지난 시절 자신의 아들에게 끔찍한 일을 당한 것을 알고도 결국엔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용서하고자 했던 나왈의 마음을 누가 감히 헤아릴 수 있을까. 진실은 충격적이기에 상기시키고 싶지 않은 기억이지만, 나왈은 그 진실을 마주하고 기록하며 전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폭력을 평화로 바꾸어나가는 첫걸음을 만들어간다.


영화는 전쟁 지역을 명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편적이고, 전쟁을 드러내지만, 그 안은 대립과 폭력, 차별과 혐오를 내포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무의식을 보여준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보이지 않고 해석되지 않은 상처와 폭력이 가득하다. 그렇기에 영화는 시대와 국경을 허물고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이야기임을 강조한다.


전쟁과 폭력으로 인해 사랑은 그을렸고, 어쩌면 타들어 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왈은 그 그을림 속에서 형태가 망가졌다고 사랑의 숭고함까지 망가지기를 택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숭고한 사랑을 다음 세대에게 계승하여, 진실 앞에서 침묵하는 것이 더욱 깊은 어둠의 삶임을 표현해냈다. 이런 맥락에서 ‘아는 것은 힘’이 맞다. 우리는 앎을 바탕으로 계속 성찰하고 사유하며 지난 세대의 잘못된 굴레를 끊어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https://www.artinsight.co.kr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한 글입니다.)

keyword